“넌 죽게 될 거야. 너도, 너도, 너도. 우리 모두 결국 죽어. 그러니까 남들 따라 떠밀리듯 살지 마. 하고 싶은 거 해. 실수도 해보고, 모험도 해. 제대로 살아 봐.”
2018년 영화 ‘수상한 교수’에서 조니 뎁이 연기한 주인공 리처드 교수의 이 대사는 오래도록 귓가에 남는다. 그는 미국 명문대 소속으로 지성과 유머를 겸비한 멋진 영문학 교수였다. 어느 날 등이 아파 들른 대학병원에서 의사가 무표정하게 건넨 한마디가 그의 세계를 무너뜨린다. 폐암 4기. 남은 삶은 그저 모래시계처럼 빠르게 흘러내릴 뿐이었다.
리처드가 택한 길은 파격적이었다. 그는 규범을 벗어던지고 자유인처럼 살기로 마음먹는다. 강의실에서는 거침없이 진심을 쏟아내고, 술과 쾌락으로 밤을 채운다. 심지어 학생 강의를 술집에서 하다가 웨이트리스를 유혹하기도 한다. ‘막살기’라는 말이 딱 어울리지만, 희한하게도 그 속에서 오히려 삶의 본질에 차츰 가까워지는 듯 보였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삶을 성찰하는 아이러니다.
그가 ‘치료’ 대신 ‘막살기’를 택한 이유는 짐작할 만하다. 리처드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항암 치료란 독한 화학요법뿐이었을 것이다. 탈모와 구토, 극심한 쇠약을 견디며 얻는 보잘것없는 생명 연장. 삶의 질을 송두리째 포기해야 하는 치료라면, 차라리 남은 시간을 나답게 불태우겠다는 결심은 그가 가진 정보 안에서는 합리적이었다.
그런데 문득 묻게 된다. 만약 오늘, 2025년의 리처드가 동일한 진단을 받았다면 여전히 그렇게 살았을까?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폐암 4기라는 말은 곧 ‘끝’을 뜻했다. 그 말은 환자 가슴에 시한폭탄처럼 꽂혔고, 남은 생은 1년이 채 안 되는 짧은 불빛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졌다.
유전자 검사가 세포의 비밀을 들춰내면서, 암세포마다 가진 약점이 하나둘 드러났다. EGFR이라는 변이를 가진 환자는 예전에는 1년 반 정도가 전부였지만 이제는 3세대 약제인 오시머티닙 덕분에 3년, 4년을 거뜬히 살아간다. 어떤 이는 5년을 넘어 여전히 삶을 이어가기도 한다. 한때 촛불처럼 금세 꺼져가던 시간이 이제는 사계절을 거뜬히 동행하는 등불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ALK라는 변이를 가진 환자들에게도 새로운 길이 열렸다. 크리조티닙, 알렉티닙, 로라티닙으로 이어지는 신약의 계단을 하나씩 오르다 보니 진단 후 무려 10년을 넘긴 사례까지 나왔다. 과거라면 기적이라 불렸을 생존이 이제는 가능성의 이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면역항암제. 펨브롤리주맙이나 니볼루맙 같은 약들은 마치 잠든 군대를 깨우듯 면역세포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암세포가 걸쳐 놓은 가면을 벗겨내고, 억눌렸던 면역력을 다시 모으게 한다. 특히 면역조직화학 검사상 PD-L1이 많이 발현된 환자에게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예전 같으면 1~2년 만에 꺼지던 생명이 두 배 가까이 길어지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5년이 지나도 여전히 병이 고요히 멈춰 서 있는 듯하다.
물론 이 모든 혜택이 모든 환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 폐암은 여전히 가혹한 운명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우리는 더 이상 ‘말기=절망’이라는 단순한 등식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막살기라는 체념 대신, 끝까지 살아내겠다는 희망이 충분히 손에 잡히는 시대다.
원자력병원은 전통적으로 ‘4차 병원’이라 불린다. 다른 대학병원에서 사실상 치료를 포기한 환자들이 마지막 희망을 붙잡고 찾아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말기 암 환자들이 가끔 우리 병원에 입원한 뒤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말하는데 이유가 묘하다.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중환자인 줄 알았더니, 바로 옆 침대에 자신보다 훨씬 위중한 환자가 누워 있기 때문이란다. 인간은 이렇게 서로의 고통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위안을 얻기도 한다.
첨단 치료법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에도 우리 의료진은 ‘끝까지 함께 하는 병원’이라는 자체적인 모토 아래, 환자들의 생존 연장을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그래서인지 나는 언제나 ‘치료 중단 후 막살기’라는 결심이 낯설다. 병원에서 마주하는 현실이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단 하루를 더 살기 위해, 혹은 가족의 졸업식이나 결혼식 같은 중요한 순간을 한 번이라도 더 함께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치료를 감내한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대신, 마지막까지 ‘나’로 남기 위해 싸운다. 그 처절한 의지와 인간 존엄의 무게를 목격한다면, 리처드의 선택은 아무리 영화적 설정이라 해도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영화의 결말에, 리처드가 차를 몰고 반려견과 함께 자신의 의지로 생을 마감하는 장면에서 나는 한참 눈을 떼지 못했다. 죽음이 아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암병원에서 오래도록 근무했지만, 그 장면은 나를 흔들었다.
그의 선택을 용기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무책임이라고 해야 할까.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다가오지만, 그래도 인간다운 삶이란, 적어도 의식이 온전하다면 가녀린 호흡이라도 끝끝내 붙들고자 애쓰는 우리의 몸부림 속에 있지 않을까.
결국 이 영화가 남긴 질문은 단순하다.
‘오늘 내가, 혹은 내 가족이 폐암 4기라는 진단을 받는다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리처드가 보여준 삶의 태도는 영화적 장치일 뿐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과학이 선물한 새로운 가능성 위에 서 있다. 버겁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내게 허락된 날들을 붙잡아 더 단단히, 더 나답게 살아내는 선택이 가능하지 않은가.
어쩌면 진짜 멋진 교수란 인생을 내던지는 이가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삶이라는 수업을 스스로 이어가는 이인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