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회용 밴드와 영양제 등 배부하고 6.25 참전용사와 미망인에게 성금 전달
황규석 회장 "한국전쟁에 도움준 필리핀 참전용사 및 후손들에 의료봉사 큰 의미”
박한성 이사장 "의료봉사로 우리 스스로 도움과 위로받아 오히려 즐거워”
정부의 일방적인 의대 정원 증원과 필수의료패키지정책으로 인해 의료계에선 “앞으로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는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어진 전공의들이 의료현장을 떠난 지도 어느덧 무려 6개월째에 접어들었다.
의료계는 그 어느 때보다 우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여전히 대부분의 의사들이 참을 수 없는 울분에도 불구하고 눈앞에서 신음하는 환자를 떠날 수 없어 지금도 의료현장에서 환자들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헌신은 국내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특히 자영업자나 다름없는 개원 의사들이 8월 극성수기에 일주일 가까이 병원을 비우고 자발적으로 해외 의료 봉사에 나서 개발도상국의 빈민 주거지역을 찾아 극심한 무더위와 싸우며 열악한 환경에서 인류애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면 경외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운영하던 약국을 휴업하고 봉사에 참여한 약사, 병원에 휴가계를 제출하고 참여한 간호사, 여름 방학을 맞아 참여한 간호대학생들, 기타 자원봉사자들의 노력과 헌신도 마찬가지다.
서울특별시의사회(회장 황규석)는 선한의료포럼(이사장 박한성 전 서울시의사회장)과 함께 지난 8월 10일부터 15일까지 5일간 필리핀 라구나주 산페드로시에서 6.25 참전유공자 및 가족들과 빈민 지역 저소득층 주민들을 위한 해외 의료 봉사를 진행하고 돌아왔다.
서울시의사회와 선한의료포럼이 지난달 26일 MOU를 맺고 처음으로 함께 진행한 이번 해외 의료 봉사에는 내과, 가정의학과, 소아청소년과, 피부과, 안과, 재활의학과, 성형외과, 영상의학과 등의 전문의들과 전공의, 약사, 임상병리사, 간호사 등을 포함한 총 21명의 의료진이 참여했다. 또 5명의 간호대학생과 6명의 일반 자원봉사자들이 이들을 지원했다.
봉사단이 4일 동안 진료한 총 인원은 2919명에 이르며 초음파(217건), 임상병리(260명 840건), 안과(900건) 등 검사 건수는 총 1957건, 약 조제 건수는 총 2095건이다.
구체적으로 진료과별로는 내과 746명, 소아과 278명, 피부과 366명, 안과 897명, 재활의학과 222명, 영상의학과 213명, 성형외과 47명, 한의학과 150명 등 총 2919명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했다.
이 외에도 일회용 밴드, 비타민 C, 삐콤씨 등의 영양제를 현지인들에게 배부하기도 했고, 올해 92세에 이르는 6.25 참전용사와 이미 고인이 된 참전용사의 미망인에게 소정의 성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빈민 주거지역 의료 봉사 첫날인 11일에는 산 페드로시의 Langgam 지역의 한 초등학교에서, 둘째 날인 12일에는 Southville 3A, San Antonio 지역의 관공서에서, 셋째 날인 13일에는 Laguerta - San Vicente 지역의 한 초등학교에서 봉사가 진행됐다.
의료 봉사활동이 진행된 각 장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현지 사정은 야전병원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매우 열악했다. 가뜩이나 덥고 습한 날씨에 대부분 냉방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미지근한 선풍기 바람만으로 더위를 견뎌야 했고 화장실조차 재래식이면서 수도 공급조차 끊겨 때때로 악취가 풍기기도 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서 봉사단은 매일 아침 가장 먼저 각 과별 임시 진료소, 약국 등을 세팅했고, 현지 공무원들의 지원하에 안내를 위한 간이천막, 환자대기를 위한 플라스틱 의자 등이 준비됐다.
본격적으로 진료가 시작되자 현지의 열악한 의료환경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났다. 그 상황을 직접 실제로 목도한 이라면 누구라도 측은지심을 느낌과 동시에 세계 최고 의료 수준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될 것이다.
필리핀에서도 가장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빈민 주거지역 주민들이기 때문에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병원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경증질환을 치료하지 않고 장시간 방치해 중증질환이 되어 임시 진료소를 찾은 이들도 태반이었다. 의료혜택이 전무하고 비위생적인 환경과 무덥고 습한 기후에 더해 영양까지 결핍된 이유로 한 가지 질환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복합질환을 가진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교통사고를 당해 복합골절이 발생했음에도 오랫동안 병원에 가지 못해 그대로 뼈가 붙어버려 불구가 된 채 휠체어에 의지해 임시 진료소를 방문한 환자도 있었고, 종양 덩어리를 몸에 달고 있음에도 병원에 가지 못해 이를 방치하다가 걷잡을 수 없이 종양이 커진 상태에서 임시 진료소를 찾아 황규석 서울시의사회장에게 장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고 제거한 환자들도 많았다.
영상의학과에서 시행한 초음파 검사에선 적지 않은 환자들에게서 암 의심 소견이 나와 이들이 병원에서 암 진단 검사를 받을 것을 시 당국에 의뢰하기도 했다.
열악한 환경 때문인지 기자의 눈에는 마치 70대로 보였음에도 실제론 자신이 50대 초반의 나이라고 밝힌 이날 진료를 받은 한 여성 현지인은 기자와 인터뷰에서 “온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병원비가 없어 병원을 가기 힘든 형편인데, 한국에서 매년 의료봉사를 와 무료로 진료를 해줘 저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건강을 잘 챙기고 있다”며 “한국인들은 천사나 다름없다. 너무나 감사드리며 늘 하나님이 당신들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빈민 주거지역 의료 봉사 마지막 날인 13일에는 오후 4시경 진료를 마친 후 아트 메르카도 산페도르시 시장이 봉사단을 시청으로 초청해 환영 모임을 갖고 참석자 전원에게 감사장을 전달했다.
아트 메르카도 시장은 “열악한 의료환경에 놓인 시민들에게 필리핀 정부와 시 정부에서 해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는 상황에 매년 선한의료포럼에서 의료진들이 방문해 정성껏 의료혜택을 제공해 준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봉사활동에 참여한 여러분들에게도 늘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길 바라며 필리핀에서 남은 시간 동안 좋은 추억을 만들고 무사히 한국에 귀국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14일에는 마지막 일정인 ‘6.25 참전유공자 및 가족’에 대한 의료 봉사가 필리핀 한국전쟁 참전기념관에서 진행됐다. 진료 시작 전 이종섭 필리핀 재향군인회장이 참석해 필리핀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헌신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행사가 진행됐다.
특히 올해 92세의 한국전 참전용사가 정정한 모습으로 부인과 함께 진료소를 방문해 박한성 이사장을 비롯한 의료진이 피부과 진료를 비롯한 각종 진료와 영양주사 등을 시행하고 감사함을 표하는 소정의 성금을 전달하기도 해 의미를 더했다.
이번 해외 의료 봉사는 서울시의사회가 오랫동안 국내외에서 의료 봉사를 펼치며 남다른 노하우를 축적한 선한의료포럼과 협력함으로써 원활히 진행될 수 있었다. 이번 봉사활동에서도 산페드로시가 봉사단원들이 이동하는 데 필요한 교통편과 패트롤을 통한 에스코트를 지원했고 진료 현장에도 많은 공무원들이 나와 각종 행정업무를 지원했다.
지난 2008년 발족한 선한의료포럼은 노숙자, 새터민, 외국인 근로자와 참전용사 가족, 지역주민들에게 매월 넷째주 토요일 ‘이웃사랑’을 위한 봉사활동을 실천하고 있다. 특히 한국전쟁 참전국 16개국 중 최빈국인 에티오피아와 필리핀의 참전용사 및 그 가족들은 물론, 경제적 사정으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주민들을 위해 지난 2008년부터 8월 15일 광복절 전후로 매년 한 차례씩 무료진료 봉사를 이어 오고 있다.
앞서 박한성 선한의료포럼 이사장은 지난 2000년 의권투쟁 이후 국민과의 신뢰를 더욱 굳건히 구축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껴 서울시의사회 제28대 회장으로 재임 중이던 지난 2003년 서울시의사회 산하에 의료봉사단을 만들어 지금까지 외국인 의료 봉사를 비롯한 각종 활동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황규석 서울시의사회장은 “서울시의사회 의료봉사단이 지난 2003년 설립돼 21년이 지났는데 지금까지 국내 의료 봉사를 위주로 진행하다가 최근 해외 의료 봉사에 대한 오랜 경험과 노하우를 갖고 있는 선한의료포럼과 MOU를 맺고 이번에 처음 해외 의료 봉사를 함께 진행하게 돼 큰 의미가 있다”며 “선한의료포럼과 협력한 덕분에 산페드로시로부터 교통편부터 행정업무까지 지원을 받아 원활하게 의료 봉사활동을 진행하며 현지 주민들에게 더 큰 의료혜택을 효율적으로 제공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6.25 당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국전쟁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필리핀의 참전용사들과 그 후손들에 대한 의료 봉사도 할 수 있어 더 큰 의미가 있었다”며 ”이번 행사를 계기로 서울시의사회가 앞으로 해외 의료 봉사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박한성 이사장은 “의료 봉사를 할 때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도움과 위로를 받으며 즐거워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다만, “이번 의료 봉사에서 암 의심 소견이 나온 환자들이 많았는데 우리가 그분들에게 필요한 더 많은 의료혜택을 드릴 수 없다는 한계가 있어 너무나 안타까웠고, 암 진단 검사 의뢰서를 쓰면서 그분들이 높은 의료비로 인해 필요한 치료를 더 이상 못 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어 마음이 아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번 해외 의료 봉사는 서울시의사회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뛰어난 의료진이 대거 참여해 함께할 수 있었다”며 “앞으로도 능력이 허락하는 한 계속해서 의료 봉사활동을 지속하면서 좀 더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지원 방안도 강구하겠다”고 덧붙였다. 또 “참전용사들의 후손 중 뛰어난 학생들을 선발해 국내 우수 대학교에서 전액장학금을 지급하며 공부할 수 있게 하는 장학제도를 운영하고 싶다”는 소망도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