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수십 년의 수명이 다하면 지수화풍 4원소로 환원되어 버려서 나라는 존재는 지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는 일회성 삶을 살다가 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보니 죽음이 너무도 무서워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호소를 하는 경우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런 하소연을 하는 분들의 연령대는 어린이부터 청소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우리는 자아에 대한 개념이 생기는 순간부터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인 거죠. 
 
그런데도 죽음에 대해 직면하여 말하거나 알아보려고 하지는 않고, 도리어 죽음과 관련된 단어나 이야기는 일체 못 본 척 못 들은 척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피한다고 해서 나만 죽음이 피해 가지 않을 텐데 말이지요.
 
철학을 전공한 유호종 박사는 ‘죽음에게 삶을 묻다’라는 책에서, 오래 전의 결혼식 풍습에 빗대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얘기합니다. 근대로 넘어오기 전의 한국 사회에서는 신부 신랑이 상대방을 보지도 못 한 채 양갓집 어른들에 의해서 혼례가 결정되는 일이 많았죠. 결혼 날짜가 다가옴에 따라 신랑 얼굴에 대한 괴소문이 들리고, 그러면 신부의 마음은 불안하기 이를 데 없다가 혼례 날 신랑의 얼굴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는 불안함에서 벗어났을 겁니다. 저자는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신랑 얼굴을 몰라 두려워하는 신부의 마음 같은 것이 아니겠냐고 말합니다. 
 
또 흔히들 죽음이 TV 리모컨의 전원 스위치가 눌러져 화면이 깜깜해진 상태와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게 아니고 다른 케이블 TV 버튼이 눌러져 그 채널로 들어가게 되는 것과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해 보자고 저자는 제안합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영화 ‘히어애프터(Hereafter)’는 인도네시아로 휴가를 가 있는 동안 쓰나미에 휩쓸려 심장과 호흡이 멎었다가 사람들에 의해 구조된 후 심폐소생술로 되살아난 ‘마리’(세실 드 프랑스)가 자신의 체험(근사체험)의 정체를 알려고 찾아다니는 과정을 그립니다. 그 과정에서 사후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자신의 특별한 능력에 대해 쓴 책을 도서전의 한 부스에서 소개하고 있는 ‘조지’(맷 데이먼)를 만납니다.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믿던 기자 ‘마리’는 근사체험을 겪은 이후 새로운 진실과 만나게 되죠.    
 
‘마리’는 남자친구에게 묻습니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뭔가 존재할 순 없을까? 내세 말이야.” 친구는 “죽으면 그냥 불이 꺼지는 거지. 플러그가 빠지는 거야. 영원한 공허겠지.”, “없을 거야. 그런 게 있다면 지금쯤 누군가 발견했겠지. 증거가 있을 거야. 그런데 이 좋은 자리에서 그런 것들만 물어볼 거야?”라고 응수합니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드러나듯이, 죽음을 칠흑같이 깜깜해지는 상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얘기하는  걸 분위기를 망치는 일로 여기는 현실을 이 대화에서 역시 보게 됩니다.
 
과연 죽음은 깜깜한 어둠이고 영원한 공허일까요? 과연 죽음은 꽉 막힌 벽일까요? 죽음을 벽으로 여길 것인지 아니면 벽에 나 있는 문이어서 문 저편의 다른 차원으로 옮겨 가는 것이라고 여길지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방식이 크게 달라집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굿바이 good & bye’는 죽음과 용서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합니다. 오케스트라의 첼로 연주자인 주인공은 악단이 갑자기 해체되는 바람에 실직한 후 고향에 내려가 일자리를 찾던 중, 여행 도우미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이 사실은 ‘영원한 여행’ 도우미, 즉 시신을 염습해 입관하는 일을 하는 장례업체였죠. 보수를 후하게 줄 테니 함께 일하자는 사장의 제안을 엉겁결에 받아들인 후 염습사로서 겪게 되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가슴 뭉클한 감동과 함께 유머러스하게 그려집니다. 
 
주인공의 어릴 적 친구 어머니는, 건물을 헐고 큰 빌딩을 짓자고 떼를 쓰는 아들의 성화에도 오랜 단골손님들의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며 변함없이 목욕탕을 운영해 오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주인공은 경건하고도 정성을 다한 염습을 해드리고 시신은 화장터의 화장로로 옮겨지는데, 목욕탕의 수십 년 단골손님이자 오랜 세월 화장로의 불을 지피는 일을 해 온 노인은, 뒤늦은 후회로 흐느껴 우는 고인의 아들에게 슬픔을 누르며 이야기합니다. 
 
“여기 화장터에서 오래 일하면서 알게 됐지. 죽음은 문이야. 죽는다는 건 끝이 아니야. 죽음을 통과해 나가서 다음 세상으로 향하는 거지. 난 문지기로서 많은 사람을 배웅했지.”   오랜 경험에서 체득한 노인의 시각처럼, 죽음을 문으로 보는 죽음관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긍정적이고도 심대한 영향을 줍니다. 미국에서 발간된 방대한 분량의 죽음학 책 ‘생의 마지막 춤: 죽음, 죽어감과 대면하기 The Last Dance; Encountering Death and Dying’의 서문에서도, 죽음을 벽으로 볼 것인지 문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스위스 출신의 정신과 의사이자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칼 구스타브 융은 그의 수제자였던 폰 프란츠 여사를 통해 “죽음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알 수 없는 세계로 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또한 융 자신도 생전에 썼던 편지에서 “죽음의 저편에서 일어나는 일은 말할 수 없이 위대해서 우리의 상상이나 감정이 제대로 파악하기조차 어렵다”고 했지요.
 
여행으로 치자면 가면 돌아오지 않을 여행, 왕복이 아닌 편도 여행이라고 할 죽음의 여정을 대비하여 어떤 준비를 하고 계신가요? 도착할 곳이 어떤 곳일지, 가는 과정에서 어떤 일들을 겪게 될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2015년9월 국제적으로 명망 있는 과학자와 의사들이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Tucson)에 모여 의식의 비국지성(Non-locality)과 불멸성에 대한 선언문을 발표하였습니다. 모임의 목적은 우리가 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알아보고, 이를 임종기 환자가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게 자비롭고 인도적인 돌봄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11개 조항으로 된 이 선언문의 주요 내용은, 우리 의식은 뇌 같은 특정한 곳이나 특정한 시간에 한정되지 않고 육체의 죽음 뒤에도 계속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선언에는 생물학, 신경과학, 심리학, 의학, 정신의학을 전공한 학자와 다수의 임상의사도 참가하였습니다. 사람이 죽더라도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체나 영혼은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과학자들이 선언한 것이죠.
 
물질적인 관심에만 붙들려 살다 가기에는 우리가 찾아야 하는 삶의 의미들은 실로 심대하고 무궁합니다. “우리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고통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삶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은, 언젠가는 누구나 맞이하게 될 죽음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직면해서 성찰할 때 비로소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나와 타인, 나와 우주가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도 죽음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