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 의사 투쟁에 선배의사가 보내는 메시지 ④
2000년에서 2000명까지
업무정지 3개월 처분 통지
의약분업으로 촉발된 ‘의권쟁취투쟁’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2000년의 늦은 여름 어느날 보건복지부에서 보낸 등기 우편물이 필자가 운영했던 클리닉에 송달되었다. 우편물을 열어보니 ‘의료계 총파업 당시 업무개시명령을 위반하여 휴업했다고 의료기관 업무정지 3개월 처분’을 할 예정이라는 내용의 통지서였다.
‘업무정지’ 통지 사유는 다음과 같았다. 하이텔 KMA 대화방에서 당시 정부의 의약분엽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게재했기 때문. 대책회의를 위해 의협 동아홀에 모인 43명의 ‘통지’ 동지들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처분이 불씨가 되어 의료계 분위기가 재차 강력한 투쟁으로 흘러가자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부담을 느낀 정부는 의협과 협상, 업무정지 대신 ‘경고’ 처분만 하는 것으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일단락이 된 것은 이뿐, 공권력은 이들 43인에 대한 세무조사와 현지조사 등 이잡듯 털어내며 공권력의 뒤끝을 ‘제대로’ 선보였다.
2000년 명예전쟁, 2024년 생존투쟁
의사 단체행동은 전세계적으로 흔한 일상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1년 국립의료원 인턴 32명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집단사표를 제출한 것부터 시작해서 2000년 의약분업 반대, 2020년 4대 정책 반대, 그리고 올해 단체행동에 이르기까지 총 네 번의 단체행동이 있었다. 그중 규모가 큰 단체행동은 2000년에 이어 올해가 두 번째인데 흔히 의사 단체행동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전공의의 단체행동이다.
2000년 단체행동은 약사에게 조제권을 빼앗긴 것에 대한 반발로 나온 ‘명예전쟁’이었다. 2000년 당시 의료계는 단체행동을 ‘의권쟁취투쟁(struggle for doctor’s rights)’이라고 규정했다. 반면 올해는 다르다. 정부가 의사 업무를 ‘이권 카르텔’로 규정해버리고 의사 계층의 하향평준화를 목표함에 따라 ‘탈구축(Deconstruction)’ 이데올로기에 대한 전문직의 ‘생존투쟁’인 것이다.
탕핑과 전공의 사직
누구나 자신이 쏟은 노력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보상받기 원한다. 또 그렇게 되는 사회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다. 그런데 정부는 과학적 근거도 미흡한 가운데 전공의들이 젊은 시절 쏟은 노력에 대한 미래의 기대를 일거에 붕괴시키는 2000명 증원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러한 정부정책에 대한 전공의들의 대응은 중국의 ‘탕핑’족과 흡사하다. 탕핑이란 ‘평평하게 누워있기’를 뜻하는 중국 청년 사이의 유행어로 노력에 따른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사회에 비협조적이고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는 소극적 형태의 반항을 빗댄 단어다.
중국의 청년 세대가 ‘탕핑’을 감행한 것처럼 우리나라 전공의들도 정부의 부당한 정책에 항의하여 ‘자발적 사직’을 한 것이다.
린치핀 전공의로 지탱해 온 고단하고 기이한 공장식 의료시스템
전공의는 전문의로서 필요한 지식과 술기를 배우기 위한 수련 과정에 있는 젊은 의사들이다. 그러나 그동안 의사들은 미래에 받을 보상을 목표로 전공의로서 당연히 보장받았어야 할 수련교육 대신 노동자로서 젊은 날의 혹독한 삶을 당연시하며 살아왔다.
과거 지금보다 훨씬 의사 수가 적었던 시절에도 전공의 수련만 마치면 위내시경이나 충수절제술(맹장 수술) 정도는 거뜬히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전문과목이 세분화되면서 과거 전공의 시절에 습득했던 술기들을 전문의 자격 취득 후 펠로우(속칭 ‘펠노예’) 과정에서 수련하도록 함으로써 수련교육은 점점 더 부실해졌고 수련교육을 빙자한 의사의 노동기간은 점점 더 늘어만 갔다.
대신 국가는 전공의에게 적당한 미래 수입을 보장해주는 대신 수도권을 중심으로 대학병원 병상을 대거 증설하고 전공의를 활용하여 싼값에 양질의 의료를 제공받기 원하는 국민의 욕망을 채워주는 포퓰리즘 정책으로 내달려 왔다. 국민도 그동안 한국식 박리다매 ‘공장식 의료시스템’을 마음껏 향유해왔다.
한마디로 계속 지속하기 어려운 매우 고단하고 기이한 시스템이었던 셈이다. 전공의는 이러한 고단하고 기이한 시스템을 지탱해 나가기 위해서 주당 80시간 이상의 고품질 노동을 제공하는 ‘린치핀(Linchpin)’과 같은 존재였다. 린치핀은 본래 ‘수레나 마차의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축에 꽂는 핀’으로 경제학에서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꼭 필요한 존재’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번 2000명 증원 사태로 그동안 한국식 박리다매 ‘공장식 의료시스템’을 떠받치는 희생자였던 전공의들이 이제는 더 이상 피교육생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인권유린과 혹독한 노동을 하지 않겠다고 ‘린치핀 이탈 선언’을 한 것이다.
2000년에서 2000명까지, 그 고단하고 기이한 여정의 끝
전공의라는 린치핀의 이탈로 인해 한때 세계적 자랑으로 여겼던, 그러나 실은 말도 안되는 고단하고 기이한 여정을 이어온 대한민국의 ‘공장식 의료시스템’은 이제 붕괴되었다. 이번 전공의 사직 사태가 끝난 이후에도 대한민국 의료는 결코 그 시스템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 그렇게 돌아가서도 안된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2025년 초고령사회를 앞두고 박리다매 공장식 의료시스템의 부작용인 과잉 의료로 인해 건강보험재정 붕괴에 대한 경고음이 계속하여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포퓰리즘에 취해 그 경고음이 들리지 않았다.
건보재정 파탄이 예고된 상황에서 아무런 대책없이 대학병원 수도권 분원을 무한정 증설하고, 늘어난 병상을 돌리기 위한 전공의를 공급하기 위해 의대정원을 대폭 증원하면 결국 건보재정 파탄과 건보료 폭탄으로 국민에게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럴 리 없겠지만 유난히 ‘2000’이란 숫자에 집착하는 정부에 대해 2000개 초교 늘봄학교, 국민 2000명과 신년음악회를 즐긴 대통령, 학폭 조사업무에 전직 수사관 2000명 투입, MZ 공무원을 붙들기 위한 2000명 직급 승진 등 사례를 들면서 대통령의 멘토라는 ‘천공’의 성이 이씨라 ‘이천명’이라는 풍문이 떠돌기까지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022년 5월 취임식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반지성주의를 언급하면서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입장을 조정하고 타협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진실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대증원에 관한 논의도 마찬가지다. 포퓰리즘 대신 과학과 진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어찌 되었거나 윤석열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로 시작된 2000년에서 2000명까지 이어진 ‘실은 말도 안되는 고단하고 기이한 여정’의 끝이 올바른 의료개혁의 원년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