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시대를 앞선 초기 여의사 송복신과 한소제
[기고] 시대를 앞선 초기 여의사 송복신과 한소제
  • 안명옥 前 차의과학대 교수(제17대 국회의원)
  • 승인 2026.06.1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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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옥의 ‘역사를 만든 여의사들’(12)

1. 송복신(宋福信, 1900-1994)

송복신은 1900년 평양부에서 송상정의 장녀로 태어나 1916년 평양 숭의여학교를, 1923년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평양 숭의여학교 시절, 교사인 황애시덕 지도로 당시 유일한 비밀결사이자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조직의 시발점이었던 애국여학생 비밀결사체 송죽회 20명 창립회원으로 활동했다. 동경유학 때도 학우들과 동경여자유학생회를 조직해 2.8 독립운동의 확산을 위해 민족자결운동에 관한 비밀문서를 지니고 국내에 잠입해 3·1 운동 정보연락책으로 학생 독립운동 일선에 나섰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성악기량도 뛰어나 이왕직 양악대, 경성악대 등 120명 악사 반주로 독창회도 했고 ‘숭의음악급 강연회’에서 독창도 하며 많은 음악애호가들 사이에 알려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 『동아일보』 1922년 11월11일자 송복신과 박정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졸업을 알리는 기사
▲ 『동아일보』 1922년 11월11일자 송복신과 박정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졸업을 알리는 기사

그 후 미국에 유학해 1929년 미국 미시간 주립대에서 보건학 박사학위를 받아 이 분야 한국 최초 박사가 됐다. 미국 유학 시절인 1924년에는 유학생들이 북미조선학생유학회를 결성했는데 회계부장(재무부장)을 담당했다. 학위 후 잠시 고향 평양으로 귀국했다가 다시 도미해 미국 미시간주 공중위생국에 근무하다가 영국인 은행가와 결혼해 미국에 영주하며 이후 국내활동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아래 『동아일보』 기사는 1930년 일시 귀국 당시 기사다. 다만 『한국여자의사회 120년』 기록에 의하면 숭의여고 동창회 소식지에 1953년 남산에 숭의여고 재건시 기금을 보내왔고, 1956년과 1962년 학교를 방문했던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 『동아일보』 1930년 2월6일자 송복신의 귀국 기사
▲ 『동아일보』 1930년 2월6일자 송복신의 귀국 기사
▲ 1956년 6월11일 부부가 숭의여중고 방문 당시, 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 송복신 박사 (='한국여자의사회 120년')
▲ 1956년 6월11일 부부가 숭의여중고 방문 당시, 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 송복신 박사 (='한국여자의사회 120년')

2. 한소제(韓少濟, 1899-1997)

▲ 『동아일보』 1926년 2월16일자
▲ 『동아일보』 1926년 2월16일자

한소제는 1899년 11월27일 평북 의주 출신으로 한국 개신교 초창기 역사 개척자 중 한 명인 아버지 한석진 목사와 어머니 오선신 사이 3남 3녀 중 장녀다. 큰오빠 한민제도 의사로 일했다. 소년척후단(보이스카우트)의 창설자인 정성채와는 승동교회가 운영하던 승동남녀소학교를 함께 다녔다.

■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로의 유학
한소제는 정신여학교 졸업 후 1919년 일본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 1923년 졸업했다. 1920년 1월, 동경에 유학중이던 여학생 30여명이 여자학흥회(女子學與會)를 조직했는데, 한소제도 회원이었다. 이 단체는 1919년 ‘2·8 독립선언’, 3·1 운동에 동참했던 ‘재동경조선여자친목회’의 후신이다. 여자학흥회는 1924년 1월 『동아일보』의 친일 논설 취소, 사죄를 요구하는 성토문에 서명한 11개 단체 중 하나로 회원이던 한소제도 ‘경시청 편입 요시찰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동경여의전 재학시 일본 북해도(北海道)제대 농과를 졸업한 유학생 신동기와 결혼했다. 졸업 후 귀국했던 한소제는 남편과 함께 1926년부터 미국에 유학하고 1929년 2월5일 귀국했다. 신동기는 미국 미시건주 앨비온 대학에서 생물학을 연구했고 한소제는 앨비온대학에서 생물학을, 워싱턴대학 의학부 소아과에서도 공부했다. 

▲ 『동아일보』 1929년 2월20일
▲ 『동아일보』 1929년 2월20일

■ 여의사로, 활발한 사회운동도 함께 
1924년에는 서울총독부 병원 근무, 정신여학교 교사로 일했고 1925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개업했다. 1926년-1929년 미국에서 귀국 후 남편 고향인 전북 전주에서 개업했다. 1936년 다시 신의주에서 개업했다가 1939년에는 서울 동대문병원 경성탁아소에 근무했고 1943년에는 돈암동에서 개업했다. 한소제는 어린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1938년 직업부인을 위한 탁아소 주치의도 했다.


한소제는 사회활동가, 여성운동가이기도 했다, 일본 유학시절부터 귀국할 때면 지방계몽강연을 다녔다. 신의주, 경성 등에서 육아법에 대한 자모강습회 강연도 했고, 신문과 잡지에 부엌개량법, 「물 없이 만드는 제육」 같은 요리법도 기고했다. 여성건강과 위생문제 계몽강연과 생활개선 운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1937년 6월12일 직업여성들 자녀양육을 위해 경성아동보건회 회장인 선교사 노선복이 미국 원조와 국내 유지 도움으로 동대문병원 내 경성탁아소를 개원했는데 한소제는 이 탁아소 주치의로 일했다. 개원 후 1년 동안 52명 아동을 돌보았는데, 49명은 주야간 탁아 형식으로 하루 종일 돌보았다.

특히, 아동의 영양 회복에 노력해 경성아동보건회는 튼튼한 아동 표창식을 매년 거행했다. 치아건강 중요성도 강조하고 아동 권익을 보호하는 방송 강연도 했다.

▲ 『동아일보』1937년 6월12일 자에 실린 경성탁아소 내부
▲ 『동아일보』1937년 6월12일 자에 실린 경성탁아소 내부

한소제는 1930년대에는 여자의학전문학교 발기준비위원으로 설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 소녀운동, 한국걸스카우트의 어머니
해방 후 1946년 조직된 ‘독립헌금실행단’에도 이사로 참여했다. 이 단체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감사 헌금 모금이 목적이었다. 또한, 서울 돈암동과 혜화동에서 개업의로 활동하면서 소녀단 창단을 적극 추진했다. 1920년대 후반 YWCA운동에 참여하며 YMCA내 조직인 보이스카우트(소년단)에서 소녀들이 활동하는 것을 보고 소녀들만의 별도 스카우트대가 필요함을 인식했다. 1930년대 이후 모든 사회단체 활동이 중단된 상태였으나, 해방된 조국에서 보이스카우트처럼 소녀들에게도 활동 기회를 주려는 생각에서 걸스카우트(소녀단) 조직에 나섰다. 


한소제는 자신이 관여한 애국부인회에서 걸스카우트 조직 필요성을 주장해 후생부 사업으로 걸스카우트 조직운동을 펼쳤다. 애국부인회에서 모금도 하고 YWCA 도움도 받았다. 한소제를 비롯 여성지도자들이 미군정청을 방문해 걸스카우트 설립을 요청하여 1946년 3월29일 미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설립승인 준비회의를 가졌다.

 
12세 이상 17세 이하 소녀훈련 규약을 정하고, 한소제와 이순정, 김성실 등 12명 임원진을 구성했다. 초대 회장 김성실, 간사장 한소제가 선정됐다. 1946년 4월19일 군정청 승인이 나고 1946년 6월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대한소녀단 창립총회’를 열고 7월27일 국립과학박물관에서 제1회 소녀군대회를 열었다. 대한소녀단은 설립과 더불어 미군정청 지원으로 군정청 지하층에 대한소녀단본부를 설치했다. 

1946년 미국 걸스카우트 초청으로 그는 문교부 대한소녀단 담당자 이계숙과 함께 6개월간 걸스카우트 연수를 떠났다. 국내 최초로 걸스카우트 지도자 강습과 행정실무 강습을 받고 관련 물품과 책자, 팸플릿, 유니폼과 천 등을 가져왔다. 귀국 길에 하와이 교민들로부터 440원을 모금했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 소녀단 중앙연합회 이사로 일하며 캠핑 부장·훈련부장·대외부장을 맡아 걸스카우트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동시에 대한 YWCA 이사, 대한소녀단 이사, YWCA 가정생활위원장,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 이사, 대한기독교신자여의사회 회장, 일본 동경여의대 서울 동창지회 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한국에서 한소제의 사회 활동은 1961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면서 중단됐다. 그의 남편 신동기는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비서처장, 한국무역진흥 동경지점장을 지냈다. 1960년에는 필리핀 특명전권대사에 임명됐으나 5.16으로 1961년 해임되면서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게 되며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 구 한소제 가옥: 현 혜화동 주민센터
▲ 구 한소제 가옥: 현 혜화동 주민센터

한소제는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도 어려운 형편의 한국인 유학생들을 돌보고, 한국 잡지 『새가정』에도 기고했다. 1979년 1월호에도 기고문이 있다. 한소제는 1997년 3월4일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에서 9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특이사항으로 1940년대 지어진 한옥인 한소제 가옥이 현재는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종로구 혜화동 주민센터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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