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한국 여의사, 김점동(박에스더) (1)
최초의 한국 여의사, 김점동(박에스더) (1)
  • 안명옥 前 차의과학대 교수(제17대 국회의원)
  • 승인 2026.01.09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명옥의 ‘역사를 만든 여의사들’ (7)

1900년 서양의학을 정식으로 공부해 의사자격증을 가지고 현장에서 우리 환자들의 치료를 시작했던 한국 최초 의사는 남녀를 막론하고 여의사 김점동(박에스더, 1877.3.16.~1910.4.13.)이다. 한국 여의사 역사는 근대화 이후 여성 사회진출에서 중요한 역사성을 지닌다. 여의사는 여성으로 드물게 존중받는 이상적 전문직이었다. 첫 한국인 여의사 김점동의 탄생은 이후 다양한 분야의 여성과학자들로 분화됐으며, 현재 첨단과학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의 약진이 진행되고 있다. 

서재필이 미국 콜롬비안의대(현 조지 워싱톤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해가 1892년이다. 우리의 첫 여의사인 김점동은 8년 후인 1900년에 귀국해 바로 환자들을 진료했다.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비롯해 훌륭한 대의(大醫)였으나 우리나라에서 환자를 진료하지는 않았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1900년 김점동보다 2개월 앞서 귀국한 김익남도 한동안 병원이 채 세워지지 않은 신설 의학교 교관으로 일했다. 따라서 우리나라 최초로 환자를 돌본 의사는 서양의 4년제 의대교육을 마치고 돌아와 진료를 시작한 김점동이다. ‘2025년 보건복지통계연보’에 의하면 2024년 기준 전체 의사 수는 14만1892명이고, 이 중 여의사는 3만9451명으로 27.8%에 달한다.

김점동의 출생과 이화학당, 보구여관(普救女館)과의 인연 

김점동은 1877년 3월16일 서울 정동에서 광산 김씨 김홍택과 연안 이씨의 4녀 중 셋째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홍택이 1885년 내한한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집에서 일했는데, 아펜젤러는 1885년 9월부터 집에서 2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고(배재학당의 시작이다), 이웃에 살던 의사 스크랜튼의 어머니 스크랜튼 여사는 1886년 5월경부터 이화학당을 시작했다.

선교사들의 생활과 서양문물을 지켜본 김홍택은 1886년 11월, 아홉 살 점동을 이화학당의 4번째 학생으로 입학시켰다. 집안 사정도 역할을 했을 것인데, 딸 셋 집안에 넷째 딸이 태어나자 숙식이 해결되고 교육 기회가 주어진 이화학당에 셋째딸을 입학시킨 것이다.

▲ 보구녀(여)관(普救女館) 초기 모습 (=출처 이화역사관)

서양의 여선교사와 함께 생활하며 교육받는 이화학당은 학생들에겐 가정이었을 것이다. 초기 이화학당의 하루를 머리에 그려보면 가정이자 학교인 이화학당에서 공부하고, 놀고, 청소도 하며 서로를 자매로 아끼며 지냈을 것이다. 영어로 소통이 원활히 안되는 환경에서 시작했지만, 그랬기에 생존하기 위해 빠르게 영어를 습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화학당은 1988년에 이르러서는 점점 학생이 늘어나 13명이 됐다. 

스크랜튼 여사의 요청으로 1887년 10월에는 여성 교육자 루이자 로드와일러와 여의사 메타 하워드(1862~1930)가 내한했다. 1887년 10월31일 하워드가 진료를 시작한 이 병원이 바로 이화의대의료원 전신인 보구여관이다. 김점동의 일생에 영향을 미치는 로제타 셔우드는 1890년 10월 내한했다. 

이화학당에서 생활하던 만 11세 김점동은 1888년 장마철 어느 날 밤, 천둥 번개의 요란한 빗소리에 두려움을 느끼다가 하느님께 기도한 후 평화를 얻는 회심의 순간을 경험했고 그 이후 자신의 방에서 매일 밤 작은 기도회를 열었다. 이 기도회가 바로 한국 여성들의 자발적인 기도 모임의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김점동은 1890년 10월,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와의 만남으로 삶의 전기를 맞았다. 정동 감리교 교회 자리에 있던 시병원에서 시작해 1888년 11월 이화학당 담장 안으로 옮겨진 여성병원 보구여관에서 그동안 영어가 익숙해진 김점동과 친구들은 로제타를 도와 한국 여성들 진료 시 통역과 간단한 치료 보조역할을 하게 됐다. 

김점동에 대한 많은 기록은 로제타 홀의 일기에 근거한다. 로제타가 서울에 온 지 한 달이 채 안된 1890년 11월11일, 그는 화상으로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제외한 손가락이 붙어 치료받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16세 소녀를 수술했다. 3시간 동안의 섬세한 절개수술과 이후 필요한 피부이식 과정에서 환자가 본인의 피부이식을 거절하자 로제타가 자신의 피부를 이식하는 것을 본 김점동은 “저는 아마도 제 친자매거나 선생님이라면 피부를 떼어 줄 수 있겠지만, 남이라면 도저히 못해요”라며 몹시 놀라워했다고 한다.

이후 30여개 피부조각을 이식하는 가운데 이화학당 학생 봉업, 교사 로드와일러와 벵겔 등도 피부를 기증하겠다 했고 환자의 오빠와 환자도 피부이식에 찬동했다. 16세 소녀인 환자는 수술결과가 좋았으며 피부이식으로 잘 회복됐다. 김점동은 초기에는 수술을 불편해 했으나,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놀랍도록 열심히 노력했다고 로제타는 기록하고 있다.

1891년 신학기 시작 전 겨울방학부터 로제타는 자신을 돕는 김점동과 일본인 소녀 오가와에게 생리학을 가르치다가 신학기부터는 다른 세 학생(△봉순 △꽃님이 △여메레)에게도 일주일에 한번씩 체계적으로 생리학 수업을 했다. 동시에 보구여관에서 약을 조제하고 환자 돌보는 방법에 대해서도 지도했다. 

김점동은 만 13세였던 1891년 1월25일, 프랭클린 올링거 목사로부터 스스로 선택한 별이라는 뜻의 에스더(Esther)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에스더는 구약성서 에스더서에 나오는 페르시아 왕비로 동족인 유대인을 구하는 왕비다. 

현재로 보면 중학교 2학년 나이인 14살 되던 해인 1891년 3월 말부터, 점동은 보구여관에서 이미 능숙한 조수 역할을 했다. 점동은 모든 것을 빨리 배우고 익혔으며, 환자들이 오면 로제타 진료 전에 필수 문진을 마치고 흔한 병에 대한 로제타의 처방도 모두 익혀 두었다. 로제타는 이런 김점동을 보며 훌륭한 의사가 될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로제타는 1891년 3월과 4월, 총 4건의 구순구개열 수술(언청이 수술)을 했으며 김점동은 수술 보조도 능숙하게 했다. 이 간단한 수술이 여성들의 일생에 엄청난 반전을 가져와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지켜본 김점동은 의사가 하는 일이 참으로 아름다운 일임을 깨닫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반드시 혼자 힘으로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 홀은 전한다.

김점동의 결혼

김점동은 1892년 결혼 적령기인 16세가 가까워지자 집안으로부터 결혼 압력을 받았다. 그러나 김점동은 언젠가 미국에 가서 의학을 공부한다는 꿈을 가지고 있던 터라 결혼에는 관심이 없었다. 

로제타에게 쓴 김점동의 편지에, ‘선교사들이 점동의 신랑감을 찾아주지 않으면 하느님을 믿지 않는 남자라도 결혼을 시키겠다’는 어머니의 주장을 적으며 자신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평양이든 어디든 로제타와 함께 가겠다는 마음을 담았다.

▲ 김점동과 박여선의 결혼사진 (=출처 이화역사관)

선교사들이 김점동의 신랑감을 물색하던 중, 로제타의 남편 윌리엄 홀이 1892년 가을 평양으로 가며 고용했던 마부이자 기독교 신자가 된 박여선을 추천했다. 박여선은 윌리엄의 주선으로 학교에 다니며 한글.한자.영어 등을 배우면서 선교 사업도 돕고 있었다.

김점동의 어머니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나, 김점동은 사흘간 뜬 눈으로 고민한 끝에 당시 우리 관습으로는 결혼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과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를 받아들였다.

1893년 5월5일, 만 16세의 김점동은 아홉 살 위 박여선과 약혼하고 5월24일 기독교 예식으로 결혼했다. 결혼한 김점동은 의학공부도 열심히 하고 환자 진료도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다. 당시 로제타가 출산을 앞둔 상황이라, 김점동은 계속 서울 보구여관에서 의료활동을 도왔다.

1894년 5월4일 로제타와 김점동은 제물포항을 떠나 평양으로 가는 고기잡이배를 타고 고생 끝에 5월8일 도착했다. 그러나 동학농민봉기 등 정치사회적 문제로 평양에서 다시 제물포로 6월11일 돌아오게 됐다. 이러한 불안정한 이주와 박해를 겪으며 청일전쟁의 한가운데 처했던 김점동은 1894년 9월 초 1.8 kg의 남아를 조산해, 태어난 지 36시간 만에 사망하는 슬픈 경험을 했다. 

그러나 윌리엄 홀은 평양이 청일전쟁의 전투장이었던 터라 다시 평양으로 떠났고, 부상자 치료에 임하며 지속되는 격무와 말라리아로 다시 서울로 온 뒤 발진티푸스가 겹쳐 결국 11월24일 사망했다.

김점동은 윌리엄 홀 사망 후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로제타에게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고, 미국 선교부에 도움을 요청해 점동의 가족도 함께 미국행이 결정됐다.

1894년 12월7일 김점동 부부는 임신한 상태의 로제타 홀, 그의 아들 셔우드 홀과 함께 일본을 경유해 미국으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뉴욕행 기차를 타고 1895년 1월14일 로제타의 고향 리버티 집에 도착했다. (다음호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