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선교 시작으로 서양의학이 조선에 도래한 것은 1884년 미국의 북장로교 소속 알렌 입국이 시작이었다. 1884년 갑신정변 시 민영익을 치료하며 1885년 제중원(광혜원)이 문을 열었다. 1884년부터 1940년대까지 한국에 파견된 의료선교사는 모두 195명이다. 미국 선교부에서 파견된 선교사가 163명, 그 외 32명은 영국.캐나다.호주 선교부를 통해 한국에 왔다.
미국 선교부에서 한국으로 파견한 의료선교사 중 남성은 89명(의사 83명.의료선교사 6명), 여성은 74명(여의사 23명.간호사 42명.의료선교사 9명)이다. 남성의사 대비 여성의사의 수가 적어 보이지만 당시 미국 전체 의사 수에서 여성 비율이 1915년 3.6%, 1920년 5%임을 감안하면 많은 미국 여의사가 조선에 입국했다. 기타 국가의 선교부를 통해 파견된 인원은 남성 17명, 여성 15명이다.
이 글은 25명의 여의사들 중 한국사회와 여성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3명, 1886년 입국한 애니 엘러스 벙커와 1888년의 엘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1890년 입국한 로제타 셔우드 홀의 삶을 조선에 입국한 순서로 2회 간략 소개한다. 자세한 내용들은 ‘역사를 만든 여의사들’ 원저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애니 엘러스 벙커 (Annie J. Ellers Bunker, 1862~1938)
애니 엘러스는 1886년 7월4일 제물포에 도착한 첫 여성 의료선교사다. 제중원 설립 후 여성 환자 치료를 위한 여의사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알렌이 미 북장로교 교단에 여의사 파견을 지속적으로 요청해 내한했다.
그는 장로교회 목사 딸로 1862년 8월31일 미국 미시건 주 버오크에서 태어났다. 1881년 일리노이주 록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턴 의과대학에서 수학했다. 의과대학 시절인 1885년 페르시아(현 이란)에서 휴가차 고향에 온 선교사에게 감명받아 다음 해 페르시아 테헤란 여성병원 책임 의사로서의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둔 의대생이었던 엘러스는 미북장로교 해외선교부로부터 조선으로 의료선교를 가달라는 거듭된 간곡한 부탁에 졸업 6개월을 앞두고 2년간만 조선에서 의료선교를 하고 돌아와 학위를 마치는 조건으로 조선 의료선교를 수락했다.
조선에서 여성들을 치료한 첫 여자 의료선교사
엘러스는 제물포에 도착한 후 미공사관 옆 알렌 집에 거처를 마련하고 열심히 언어를 배우면서 제중원에서 알렌과 헤론을 도와 의료선교를 시작했다. 이후 명성황후 시의로 임명받고 명성황후와 귀부인들, 궁중 여성들을 진료하며 1888년 1월6일에는 정2품 정경부인에 제수됐다.
엘러스가 1886년 7월 내한하며 제중원 안에 우리나라 최초의 산부인과 개설인 부녀과가 신설돼 여자들도 서양의술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제중원이 구리개로 이전하며 엘러스가 부녀과 진료를 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독립건물을 갖춘 병원급 산부인과 진료가 1886년 11월8일 시작됐다. 한국 산부인과 역사에 큰 역사적 사건이다. 엘러스는 18개월 동안 제중원에 재직했다.
내한 이듬해인 1887년 7월5일, 엘러스는 육영공원 교사였던 벙커와 알렌 자택에서 결혼했다.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린 외국인들의 결혼식이었다. 엘러스를 좋아했던 명성황후는 시녀들을 파견해 결혼을 축하하고 결혼선물로 주택을 하사했다. 미북장로회 선교사로 파송됐으나, 1894년 남편 벙커가 배재학당으로 옮기며 함께 미감리회 선교사로서 1926년 은퇴할 때까지 일생을 선교에 바쳤다.
여성교육에 헌신하는 삶
엘러스는 또한 한국에서 최초의 장로교 여학교를 세우는 업적을 남겼다. 이웃 언더우드 목사는 1885년부터 자택 건너편에 고아원을 마련하고 남자아이들을 키우며 가르쳤는데, 엘러스도 제중원 업무를 하지 않는 날에는 고아원에 가서 가르쳤다.
벙커와 결혼 전인 1887년 6월, 다섯 살 여아(정례)를 집에 데려다가 글을 가르친 것을 시작으로 1888년 3월12일 자신의 집에서 15세 여학생 두 명으로 ‘정동여학당’을 개교하고 당장(교장)으로 일하며 틈틈이 가르쳤다.
1888년 3월27일 미국 북장로교에서 여의사 릴리어스 호튼이 입국하자 엘러스는 의료 사역을 후임에게 인계하고 여학교 교육사업에 전념했다. 한국 선교부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여학교였다. 이 학교가 후에 정동여학교를 거쳐 정신여학교가 됐다. 그는 YWCA 창설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국 YWCA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조언하며 창설 시 5000엔을 창립기금으로 희사했다.
1926년 7월4일 남편 벙커가 은퇴하며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1932년 남편 별세 후 유언에 따라 유골을 양화진에 안장했다. 엘러스는 1937년 다시 내한해 1938년 10월8일 서울 정동 그레이하우스에서 별세했고,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부부가 함께 안장됐다.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Lillias Horton Underwood : 1851-1921)
릴리어스 호튼은 애니 엘러스에 이어 1888년 북장로교 파견으로 한국에 왔으며, 의대를 졸업한 첫 여의사이다. 그는 자신의 전문적 활동 영역에서 선교했으며 조선과 한국사회에 괄목할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 부인 등 여러 이유로 전문가적 행적은 과소평가돼 있다.
릴리어스 호튼의 성장
릴리어스 호튼은 미국 뉴욕 주 알바니에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졸업한 직후 병으로 대학에 진학 못했으나 20대 말, 어머니의 꿈이기도 했던 선교사의 소망을 갖게 됐다. 그는 인도 여선교사에 감명받아 1887년 시카고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해 의사가 됐다. 감리교 의료선교사로 1887년 10월 조선에 와서 보구여관을 시작한 메타 하워드와 같은 대학 동기이자 동창이다.
조선으로…
당시 미 북장로회 선교부는 애니 엘러스가 벙커 선교사와 결혼한 후 여러 사정으로 제중원을 떠나게 되며 후임으로 호튼이 1888년 3월 25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후 제중원의 원장이던 헤론 부부의 집에 거처를 마련하고 즉시 제중원 근무를 시작했다. 엘러스가 담당하던 왕비 주치의 역할도 하게 됐다.
호튼은 애초에 결혼할 생각이 없었으나 그 당시 영아 소동(서울 내 외국인들의 아동 식인.인신매매 소문이 돌며 발생한 폭동) 등의 어려움을 겪으며 언더우드 선교사와 가까워졌고, 마침내 1889년 3월14일 8살 연하인 그와 결혼했다. 그는 결혼 후 신혼여행을 이북으로 갔는데, 조선 최초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을 여행하는 외국인 부부가 됐다.
릴리어스 호튼은 동시에 많은 환자들을 진료했는데, 제중원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감염병이 창궐하는 상황에서는 임시치료소에서 의료선교사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 치료에 임했다. 진료소 뜰에서 예배를 드리고 찬송가를 부르는 등 환자 대상 선교에도 열심이었다.
릴리어스 호튼은 1889년 11월에 제중원을 그만두었다. 그는 의료선교사보다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의 활동을 더 선호했던 것 같다. 초창기 조선에서 활동하던 다른 선교 여의사들이 의료사업이야말로 위대한 의사인 예수님의 사업이라고 여기며 생명의 사업으로 여긴 것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 합방된 이후 호튼은 ‘The Korea Mission Field’ 편집 책임자로 일하는 등 문서를 통한 선교 활동에도 참여했다.
언더우드가 별세한 후 ‘언더우드 전기’와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견문록 : 상투쟁이들과 더불어 15년’ 등 저술 활동에 노력해 초창기 선교 상황에 대한 이해와 선교역사 정립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 책들이 없었다면 남편 언더우드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못했을 가능성도 크다.
릴리어스 호튼은 남편 언더우드가 미국에서 별세한 이후 5년간, 외아들 언더우드 2세가 선교사로 활동을 하던 조선에 다시 돌아와서 함께 살았고, 그는 남편의 활동 내용을 글로 정리하고 번역과 문서 발간을 하며 지냈다. 이후 1921년 10월 29일 70세에 서울에서 별세해 양화진 외국 선교사 묘역에 묻혔다. 언더우드 가족으로서는 처음으로 양화진에서 안식하게 된 것이다. 1999년에는 남편 언더우드 선교사의 유해가 합장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