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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피스의 중심은 죽음 아닌 ‘삶’···더 많은 이와 함께할 것”
“호스피스의 중심은 죽음 아닌 ‘삶’···더 많은 이와 함께할 것”
  • 박예지 기자
  • 승인 2023.12.04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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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한미참의료인상 수상자] 배현정 전·진·상의원 원장
벨기에 간호사로 한국 와 중앙의대 졸업 후 의사면허 취득
시흥동 판자촌에 자리잡고 48년간 40만 명 넘게 진료해와

‘시흥동 슈바이처’, ‘푸른 눈의 의사할머니’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배현정 원장<사진>이 판자촌이었던 금천구 시흥동에 자리잡은 지도 48년이 됐다. 벨기에 간호사였던 그녀는 국제가톨릭형제회 AFI 회원으로서 1972년도에 한국에 파견되어 3년 후인 1975년에 전·진·상 가정복지센터·의원·약국·의원을 세우고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상주하지 않는 이상 상시 진료가 불가능하다는 한계를 느낀 배 원장은 스스로 의사가 되고자 1981년 중앙의대에 입학했다. 이후 1988년에 가톨릭의대에서 가정의학과 전문의를 취득하고 야간 당직, 주 1회 방문 진료, 무료 진료 등을 통해 인술을 베풀고 있다.

이와 더불어 가정호스피스 활동과 완화의료센터 운영을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호스피스가 무엇인지 그 개념조차 없던 시기다. 더 나은 완화의료를 제공하고자 1997년에는 직접 벨기에 성요셉대학병원에서 호스피스완화의료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2008년에는 서울시 1호 독립시설형 완화의료전문기관 인증을 받으며 국내 호스피스완화의료의 발전을 선도하고 있다.

배 원장은 “처음 왔을 때 시흥동은 보건소로부터도 지원을 못 받고 있는 동네였다. 가장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결핵퇴치사업과 어린이 예방접종부터 시작해서, 노인과 장애인 진료를 위해 산동네에 방문진료를 다니다보니 말기암 환자의 임종을 지키게 됐고, 간호사로서 환자를 돌보다보니 외부 봉사 의사들의 지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 중앙의대에 입학했다”며 “한국어로 공부하고, 국가고시를 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외국 학생은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 아시아계였지 서양 학생은 나 혼자였다. 그때는 한자를 많이 써서 더 힘들었다. 국시 결과를 기다리는 날에는 정말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합격자 명단을 먼저 본 기자에게서 축하한다는 전화를 받고 온 방을 뛰어다녔던 기억이 난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수십년간 삶의 마지막을 앞두고 있는 말기암 환자들과 소통해 온 배 원장은 호스피스의 중심이 죽음이 아닌 ‘삶’이라며, 그것이 호스피스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배 원장은 “호스피스에 오는 말기암 환자들이 처음에는 다 ‘이제 죽으러 가는구나. 대학병원에서도, 가족들도 나를 포기했구나’라고 생각한다. 환자 가족들도 끝까지 크고 좋은 병원에 모시는 것을 도리라고 생각해 달가워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입원하겠다고 해서 준비를 다 끝냈는데 오지 않는 환자들도 더러 있다”라며 “실제로 호스피스 입원 후 평균 생존 기간이 17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호스피스의 중심은 분명 죽음이 아닌 삶이다”라고 강조했다.

전·진·상 의원의 호스피스 병동은 독립형·가정형 병실로 10개로 이루어져 있다. 의사 3명이 상주하며 집에 있는 듯한 가족적인 분위기를 조성해준다. 많은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호스피스의 모습이지만 대형병원 위주의 호스피스가 자리잡은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형태다.

회진도 환자의 몸 상태를 점검하고 진통제를 처방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의료진들은 환자가 지난 삶에 후회를 남기지 않을 수 있도록 인생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고 한다.

배 원장은 “긴 시간 동안 항암 치료에 지쳐있던 환자와 가족들이 마지막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며 “환자들에게 항상 ‘여기에는 죽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함께 잘 살기 위해 온 것’이라고 말해준다”고 전했다.

이어 “한 번은 회진을 도는데 한 환자가 그간 살아오면서 아내와 찍은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보여줬다. 환자의 아내는 ‘우리 정말 안 가본 데 없이 재미있게 잘 살았다’라면서 결혼생활을 회고했다. 그렇게 15분을 넘게 같이 이야기를 했다”며 “그렇게 환자는 사랑하는 사람들 옆에서 추억을 회상하다가 사나흘 후 돌아가셨다. 호스피스를 하면서 마음이 안 좋을 때도 있지만 감동적인 순간이 더 많았다”고 웃음을 보였다.

배 원장은 일반 진료를 볼 때도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 너머까지 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한국 정부가 초고령사회의 의료 대안으로서 각종 시범사업을 펼치고 있는 ‘커뮤니티 케어’, ‘통합돌봄’의 가장 모범적인 모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 원장은 “차트를 가족 단위로 관리한다. 초진 때는 환자에게 가족력 가계도를 그려달라고 하고, 사는 이야기를 듣는다”며 “가족 중에 의료적으로 또는 복지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지도 묻고, 있다면 사회복지사를 연결해준다”고 말했다.

또 “초진에는 정말 시간을 많이 들인다”며 “피부병으로 온 환자여도 꼭 청진을 해본다. 특히 초기 심장판막증은 청진을 하지 않으면 잡아내기 힘들다. 전혀 모르고 있다가 여기 와서야 심장판막증이 있는 것을 안 환자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어느덧 배 원장이 특별귀화자로 한국 국적을 받은 지도 10년이 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질만도 한데 그녀는 전쟁이 나도 한국에 있겠다고 말했다.

배 원장은 “처음부터 죽을 때까지 한국에서 봉사하겠다는 사명을 갖고 왔다. 여기가 내 집이다.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까지 쉽지 않았다. 이 귀한 것들을 두고 벨기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라며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는 가끔 벨기에에 갔다. 부모님께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할 때면 나도 모르게 프랑스어가 아니라 한국말을 하고 있었다. 벨기에가 아니라 여기(시흥동)를 자꾸 ‘우리집’이라고 하니까 어머니가 서운해하시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미참의료인에 선정된 소감을 묻자 그녀는 “해야할 일을 했을뿐이다. 혼자가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라고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존엄한 죽음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지만 오히려 호스피스 기관이 줄어들고 있어서 안타깝다”라며 “앞으로도 이 자리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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