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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음파 이어 뇌파계까지···법원 판결에 신음하는 의료계
초음파 이어 뇌파계까지···법원 판결에 신음하는 의료계
  • 배준열 기자
  • 승인 2023.08.24 1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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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산부인과 12억 배상 판결까지···의료과실 형벌화 경향도 과도해
사법부에 대한 신뢰 무너져 “삐끗하면 교도소, 누가 필수의료 하나?”

초음파에 이어 뇌파계까지 한의사의 사용을 허용하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처럼 의사 고유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 판결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면서 사법부에 대한 의료계의 불신과 불만이 극에 달한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의료과실에 대한 형벌화 경향도 매우 과도한 것으로 나타나 “법원이 대한민국 의료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성토까지 나온다.

앞서 지난 18일 대법원은 한의사 A씨가 보건복지부를 상대로 낸 ‘한의사 면허자격 정지처분 취소 소송’에서 “관련 법령에 한의사의 뇌파계 사용을 금지하는 어떠한 규정도 두고 있지 않다”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이 한의사의 뇌파 측정 기기(뇌파계)를 활용한 진료가 적법하다고 판결하자 의료계는 일제히 반발했다. 판결 이후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해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 대한치매학회, 대한병원장협의회 등 의료단체들은 일제히 비판 성명을 내고 판결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현대의학적 이론에 따라 만들어진 의료기기인 뇌파계만으로 파킨슨병과 치매 등 질환을 정확하게 진단하기는 의사들도 매우 어려운데 이를 한의사에게 허용한 것은 의료의 전문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무면허의료를 조장해 국민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대법원은 뇌파계뿐만 아니라 초음파 진단기기를 수차례 불법으로 사용해 1심과 2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한의사 B씨에 대해 한의사의 진단용 의료기기 사용에 대한 새로운 판단기준이 필요하다면서 지난해 12월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후 24일로 예정된 파기환송심이 오는 9월 14일로 연기됐지만 대법원 판결이 파기환송심에서 바뀔 가능성이 적어 판결 자체가 뒤집어질 확률은 높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의사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 판결은 물론 의료과실에 대한 형벌화 경향도 매우 높아 사법부에 대한 의료계의 불신과 불만은 더 가중되고 있다. 

최근에도 산부인과 의사의 진료에 책임을 물어 12억여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도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의료계와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 5월 수원지방법원 평택지원은 의료진이 임산부에 대한 상태관찰에 소홀해 신생아가 뇌성마비로 인한 장애를 입게 됐다고 판단해 분만 담당 의사에게 12억여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의료계는 분만 전 태아 상태를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운 의학적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항력적 의료사고에 대해 최선을 다한 의사에게 거액의 배상 판결을 내린 것은 너무나 가혹한 처사라는 입장이다. 이번 판결로 그렇잖아도 심각한 산부인과 기피 현상이 더 심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터져 나온다.

뿐만 아니라 최근 서울고등법원 제9형사부는 전공의 1년 차 시절 응급실을 찾은 60대 여성의 ‘대동맥박리’를 잡아내지 못한 응급의학과 의사에 대해 업무상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 진료 기록을 조작한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징역형(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형이 확정되면 해당 의사는 형사처벌과는 별개로 의사면허도 취소될 수 있는 상황. 

의료계는 1년차 전공의의 오진에 대해 과도한 형벌을 내린 이번 판결로 인해 응급의학을 비롯한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필수의료 과목 선택 기피현상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법조계가 의료계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은 수치적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의료과실에 대한 형벌화 경향이 유독 두드러지는 것.

최근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가 분석한 검찰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의사 1인당 연평균 기소율은 일본·영국 대비 256배·895배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1년부터 2018년까지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기소된 전문직은 8255명(연평균 1032명)인데, 이 중 의사는 6095명(연평균 762명)으로 무려 73.8%나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매일 약 3명의 의사가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기소되고 있는 셈이다.

이로 인해 의사들 사이에선 “삐끗하면 교도소에 갈 수 있는데 누가 생명과 직결된 필수의료 분야에 지원하려 하겠냐”라는 성토가 터져 나온다.

우봉식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장은 23일 기자와 통화에서 “의료가 워낙 전문성이 높은 분야이다 보니 일부 선진국에선 이를 고려해 의료전문법원을 두는 등 많은 조치를 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의사 면허를 가진 판사를 배치해 의료전문재판부를 구성하는 등의 조치를 하면 어처구니없는 판결은 크게 줄어들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특히 초음파, 뇌파계 한의사 사용 허용 법원 판결과 관련해선 “대법관들의 의료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의사와 한의사 간의 정의를 저울질함으로써 잘못된 판결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며 “이보다 환자의 정의라는 관점에서 환자의 건강에 해를 끼치지 않을 수 있도록 판결을 내렸어야 했다”고 말했다.

의료과실에 대한 과도한 형벌화 경향와 관련해선 “일본의 경우 진료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해서 의사를 처벌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의사가 윤리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경우가 아닌데도 단지 오진했다는 이유로 처벌하는 것은 너무나 부당하다. 그렇다면 의사가 신이 아닌 이상 누구라도 처벌을 피할 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 소장은 “최근 발생한 ‘대구시 17세 환자 응급실 뺑뺑이 사망 사건’과 관련된 전공의가 피의자로서 경찰 조사를 받은 이후 실시된 올해 하반기 전공의 모집에서 당장 응급의학과 전공의 지원율이 극히 저조하게 나타났다”며 “응급의학을 비롯한 생명과 직결된 필수의료의 몰락을 더 이상 방치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법원은 앞으로 각성하고 제대로 된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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