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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사원로탐방]주일억 한국여자의사회 전 회장
[여의사원로탐방]주일억 한국여자의사회 전 회장
  • 유경민 기자
  • 승인 2008.02.19 1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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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자의사회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해낸 바 있는 주일억 한국여자의사회 전 회장을 만났다.

경복궁 근처 자택에서 만난 주일억 전 회장은 산부인과 진료실은 떠났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의사회 모임에 참석하는 등 바쁜 일상을 지내고 있었다.

주 전 회장은 3년 전에 40여년의 진료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79세까지 진료실을 지킨 셈이다. 물론 수술을 안 한지는 그보다 전이지만 다른 이들보다 진료실을 오래 동안 지켜온 것은 ‘주일억 산부인과’를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술을 요하지 않는 치료를 위해 찾아오는 이들이 있어 병원 문을 닫을 수 없었다”는 그는 “믿고 찾아주는 환자들이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보람을 느끼게 했다”고 회상했다.

진료실을 떠나면서 돌아보니 그간 만명이 넘는 아기를 받았다. 동네를 지나다보면 “제가 이 병원에서 태어났어요”라며 아는 체를 하는 학생들이 있어 소소한 기쁨을 전해주곤 한다.

평생 하던 일을 놓고 나니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못 챙겼던 가족과 일가친척들의 경조사에 참석하느라 더 바빠졌다. 주 전 회장은 여의사회 월례회에도 꼬박 꼬박 참석한다.

매사 주어진 일에 열심히 하는 그의 모습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됨은 물론이다.

한국여자의사회를 국제 무대로 = 주일억 전 회장에 대해 말하라고 하면 단연 국제여자의사회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의 여의사로서 처음으로 국제여자의사회 부회장에 당선돼 국제 무대에서 활동했다. 그 당시 국제여자의사회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했던 것도 주 전 회장이다. 국제여자의사회에 꾸준히 참석하면서 한국여자의사회가 인정받아야겠다는 생각에 국제적으로 발돋움하려는 목표 갖게 됐다.

그를 통해 국제여자의사회에 한국여자의사회를 알릴 수 있었고 또한 국제여자의사회 활동에 전혀 정보가 없었던 한국에 국제 활동상을 알리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처음 국제여자의사회 행사에 참석해 무턱대고 회장 회의, 이사 회의 등에 참석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머뭇거리기 보단 일단 맞닥드리고 보자는 과감한 행동이 국제 무대에 빠르게 적응하는데 도움이 된 것이다.

이렇게 국제 무대에서 다른 나라 여의사들과 안면을 익혀간 그는 1978년 국제여자의사회 부회장 선거에서 일본의 닥터사노와 경합을 벌인 끝에 당선됐다. 한국에서 국제여자의사회 부회장이며 서태평양지역 담당이 나왔으니 국제적 위상이 한 층 높아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주 전 회장은 “국제여자의사회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고 비행기 삯이나 참가비 등에 대한 지원도 전혀 없던 시절, 자비를 들여가며 국제회의에 참석한 것은 ‘도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며 “때론 겁 없는 행동이 필요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지금과 달리 여자가 외국에 나가는 일이 ‘거사’로 여겨지던 시절, 여권도 남녀차별이 있어 남자보다 더디 나오고 국제 행사에 참석하는 일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너덧명이 국제행사에 나가보니 같은 아시아 지역의 일본은 100명도 넘는 인원이 참석했더라는 것. 거기서 다수의 참여가 우선돼야 한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꼈다고 한다.

1978년 서독 베를린에서 개최된 16차 국제여자의사회의에는 주일억 회장 외 19명의 회원이 참석했고 이때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연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지금이야 외국 나가는데 여자라고 막아서는 사람 없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모든 국가시험에서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수석을 차지하는 일도 다반사이니 이런 소식들이 반가울 따름이다.

경성여의전 시절 학생회장으로 활동 = 주 전 회장은 이미 1955년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공부하러 떠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겁 없이 시도하는 도전의식은 이때부터 발휘됐다.

막내임에도 자립심이 강해 뭐든지 알아서 계획하고 결정했다는 그는 경성여의전 시절 학생회 회장을 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학생이었다.

당시 학생회장은 교수와 학생의 정보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어서 지금에 비해 소극적 활동에 불과했지만 리더자로서의 인생의 시작인 셈이었다.

‘면학동지회’라는 모임을 통해 학문에 열정을 쏟고 인간관계를 넓히는 계기가 됐지만 육이오 전쟁으로 인해 모임이 해체돼 아쉬움을 남겼다.

부지런히 움직임는 것이 건강한 삶에 도움 =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에 대해 주 전 회장은 딱히 비결이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오전 중 일간지 두 세 가지를 꼼꼼히 읽고 의료계 전문지와 간행물 등을 읽는다.

예전에 비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우편물을 확인하는 동안 오전 시간이 지나간다.

매일은 아니지만 간간히 부부가 집 근처 경복궁이나 사직공원을 거닌다.

인사동 거리나 교보문고, 청계천 등 집 주변에 쉬엄쉬엄 다닐 곳이 많다.

무학여고 동창회 모임과 대학 동창회, 여의사회 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서 사회적 신체적 정신적 활동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일상생활을 되짚어 주는 것에서 그의 건강 비결을 알 수 있다.

“내가 젊었을 때 보다 훨씬 잘하고 있는 후배들의 모습을 보면 자긍심을 갖게 된다”는 그는 여성의 능력을 거침없이 보여주고 있는 후배들이 있어 든든하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의료계 환경이 예전같지 않다는 것. 특히 산부인과 등 기피과가 생겨나는 현실에 대해 불가항력인 부분에 있어서는 정부에서 도와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 유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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