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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대학병원의 태동과 발전사
타이완 대학병원의 태동과 발전사
  • 의사신문
  • 승인 2008.02.0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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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大醫院 重要 大事記 1895∼1995년

타이완대학의원이 창설된 것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미 100년의 역사가 흘렀다. 이것은 일본강점기에 공립 병원의 설립이 개시된 것뿐만 아니라 당시 타이완 유일의 교육병원이고, 전후에도 변함없이 타이완지구에서의 의료 보건 및 의학교육과 연구 활동을 계속 이끌고 있다.

■1895년 대일본타이완병원 설립 1895년 6월 17일에 일본정부는 타이완을 접수할 가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 총독을 파견하여 청의 순무아문(巡撫衙門)에서 정치를 개시하는 전례(典禮)를 거행했고, 이날은 시정기념일(始政記念日)로 정정(訂定)하였다. 그 때도 여전히 전 타이완 여러 곳에서 의민(義民)이 봉기하고 도처에서 일본에 대항하였다.

3일 뒤 6월 20일에 대일본타이완병원(大日本台灣病院)이 대북 시외 대도정천추지에(台北 市外 大稻埕千秋街: 현재의 台北市 貴德街)에 설립되었고, 이것이 곧 타이페이 병원(台北醫院)의 전신이다. 이 의원 창설 초기에 일본 타이완 사무국이 파견한 의사 10명, 약제사 9명, 호사(護士: 간호사) 20명이 타이완에 와서 활동하였다.

1896년에 일본정부는 대만을 점령한 후에 일본군의 사망이 4806명인데 전사는 겨우 164명인데 병사는 4642명에 달했는데 그중 학질에 걸려서 병사한 것이 많아서 일본 정부가 당시의 대만 열대병에 대해 간담이 서늘하고 심장이 쿵쾅거릴 정도로 놀랐다.

사실 1874년 무딴서(牡丹社) 사건(1871년 겨울에 오끼나와의 배가 대만 해안에 태풍으로 표류하여 상륙하였는데 대만에 저항하던 고산족에 의해 대다수일본인이 살해되고 일부가 송환되었는데 이를 구실로 일본이 무딴써(지명)에 침략한 사건으로 쌍방이 20명이 전사했으나 550명 이상의 일본군이 병사함)으로 대만을 침략한 일본군은 이미 전염병으로 인하여 참담한 대가를 치뤘기에 대만 통치 중 가장 먼저 식민지에 의료위생 시설을 만들고,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개선을 모색하고 역병(疫病)의 유행을 막고자 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일본인이 우선 대만 총독 관방(官房)에 위생사무소를 설치하여 대만 위생 사무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뒤에 위생과로 바꾸고 전 대만 위생 활동을 추진할 최고 행정기관으로 일하였다.

1896년 8월에 영국인 W.K. Burton이 일본 내무성 위생국장 겸 대만 총독부 위생고문인 고토오 신페이(後藤新平)의 초청에 응하여 대만에 와서 타이페이(台北) 지구의 수도설계공정의 책임을 맡았다. 3년 후인 1899년에 겨우 44세의 장년의 나이인 Burton이 병으로 인하여 타이페이 병원에서 객사하였다.

비록 타이페이 쯔라이수이 창(自來水廠: 수도국)이 1910년에 준공되었지만, Burton이 타이페이(台北) 위생 시설 건설에 착수하였기에 마침내 완공되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타이완(台灣) 쯔라이수이(自來水; 수도)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게 됐다.

■ 근대 의학교육의 태동 1897년에 치엔취 지에(千秋街)의 타이페이 병원(台北病院)은 의학강습소를 설립하였고, 대만 젊은이들에게 의학과 아울러 보통학과(普通學科)를 전수하고 대만 출신 의사를 양성하는 것을 기약하고, 일본 출신 의사의 부족을 보조하게 하였다.

이것이 대만의 관설(官設) 근대 의학 교육의 남상(濫觴)이다. 1899년 2월 20일에 칙령 제 95조인 ‘타이완 총독부 의학교 관제(官制)’ 반포에 의하여 4월 1일에 대만 총독부 의학교가 대북에 창설되었다. 대북의원은 원장인 야마구치 히데타카(山口秀高)에게 교수와 교장 임명을 위임하였다.

5월 30일에 부령(府令) 제54호인 의학교 규칙을 발표하였다. 즉 규정 수업년한은 예과 1년, 본과 4년으로 식물학, 물리학, 화학, 수학, 지리, 역사, 윤리, 외국어, 체조 등이 있고 본과에는 해부학 및 실습, 생리학 및 실습, 물리학 및 실험, 의용동물학, 의용식물학, 약물학, 병리학 총론, 외과학 총론, 병리 해부, 진단학, 붕대학, 병리학 각론, 외과 각론, 매독학, 소아병학, 의용 기계학, 외과 수술학, 내과학 및 임상 실습, 안과학 및 실습, 법의학, 정신병학, 부인병학, 위생학, 위생제도, 세균학, 의학역사, 외국어, 체조 등이 있다.

1918년 7월에 칙령 제 257호가 다시 의학교 관제와 부설 일본 문부성 지정의 의학전문부를 수정하여서 역시 편제를 확장하여 열대의학 전공과(수업연한 1년) 및 연구과(수업연한 3년)을 설치하였다.

1919년에 대만 교육령을 공포하여서, 의학교를 ‘대만 총독부 의학 전문학교’로 개칭하였다. 1922년에 신대만 교육령의 전문학교령에 따라서 ‘대북의학전문학교’로 개칭하였다. 교학의원(교육병원) 역할을 하는 대북의원은 수차례의 이름이 변경되는 것을 거쳐서, 1898년에 ‘대만 총독부 대북의원’이라고 정식으로 명명되었고, 같은 해 7월에 따따오청 치엔취 지에(大稻埕千秋街)에서 시내의 아카시 마치(明石町)으로 이전하였다. 차후에 건설하여 대만 의학의 영도적 지위를 이룬 본원의 기초를 다졌다.

본원 초창기에는 겨우 내과와 외과 두 과만이 있었고, 1897년 3월 안과부가 내과로부터 분리하여 독립된 부(部)를 이루었다. 1898년 7월, 본래 외과부의 산과 부인과가 다시 독립하여 양과가 다시 제1부 및 제2부로 나뉘었다.

1902년 초에 이비후(耳鼻喉)과가 외과로부터 독립하여 하나의 과가 되었다. 1903년에 외과부안에 피부매독과(皮膚病黴毒科)가 창설되었다. 1906년 소아과가 원래의 내과부에서 나와서 1개 과로 독립하였다. 동시에 또 외과부에 치과 치료실을 설치하였다. 1908년 피부병 매독과(皮膚病黴毒科)가 외과부로부터 독립하였고, 그 다음해에 피부병 화류병과부(花柳病科部)로 개칭하였다. 1910년 원래의 외과부의 치과가 다시 독립하여 하나의 과가 되었다. 각과의 설립, 점진적 변천과 분리작업은 환자의 수요와 아울러 의료기술의 진보와 모두 관련이 있다.

■1928년 타이페이 제국대학 정식 창설 1928년 3월에 타이페이 제국대학(台北帝國大學)이 정식으로 창설되어 문정학부(文政學部)와 이농학부(理農學部)가 설치됐고, 1936년 4월 1일에 타이페이제국대학 의학부(台北帝國大學 醫學部)가 성립되었고, 타이페이의학전문학교(台北醫學專門學校)를 합병하여 제국대학부속 의학전문부로 하였다. 1938년 4월에 대만 총독부는 타이페이 병원(台北醫院)을 타이페이제국대학 의학부(台北帝國大學醫學部) 부속의원으로 이관하는데 동의하여, 본원이 대만 최고의 대학의 교학의원으로 어언(於焉) 확정되었다.

당시에 제1, 제2, 제3 내과, 제1, 제2, 제3 외과 및 산부인과, 안과, 소아과, 피부비뇨기과. 이비인후과, 정신과, 치과, 방사선과 등 14개과로 나누어져 있었다.부속의원의 총면적은 2만4290여 평이고, 건평은 1만0350평에 달했다(1940년에 조하한 수치에 근거함).

1939년 4월에 타이페이(台北)제대의학부는 열대의학연구소를 창설하여 열대병학과, 열대위생학과, 세균면역학과, 화학과, 영양학과 아울러 한약학과 등 6개 학과가 개설되어 있었다. 열대의학의 연구에 관하여 성과가 현저하였고, 본원의 의료활동이 널리 평등하게 사랑하고 설비의 협력의 성과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공이 있다.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은 비록 종말로 급물살을 타고 있었으나, 대만에 대한 연합군의 공습횟수가 늘면 늘었지 줄지 않고 있었다. 본원은 의미 없는 손실을 줄이기 위하여, 마침내 따오위앤 따시(桃園大溪)로 긴급 소산(疏散)하였고 동시에 따시(大溪)의 공학교(公學校)에 임시의원을 설립하였다. 입원치료가 필요한 환자를 이곳으로 이전하였고 외래진료와 교학(敎學)에 관한 것은 아직도 타이페이(台北)에 남아있었다.

1945년 5월 31일에 미군 B-24 폭격기들이 타이페이시(台北市)를 맹폭격하여 본원도 역시 피해를 입었는데 500㎏의 폭탄이 11개가 명중되어 피해 상황이 매우 심하여 기능이 거의 없어졌다.

8월 15일에 일본천황이 투항을 선포하여서, 본원은 따시(大溪)소산지( 疏散地)로부터 돌아왔고, 당시의 뚜총밍(杜聰明)을 위시한 6인의 모임 취우시롱,리전위앤,슈찬황,웡틴준,슈쟝,라이쟈오똥(邱仕榮, 李鎭源, 許燦煌, 翁廷俊, 許强, 賴肇東)인 대만 출신의 의사조직인 ‘대의동학회(台醫同學會)’가 일찍이 타이페이(台北)의학원 및 양소부속 의원인사(兩所附屬 醫院人事)와 편제(編制)에 관하여 여러 가지 중요한 결정과 대책을 만들어 냈다.

■1945년 국립타이완대학의학원으로 개칭 1945년 10월에 항복 전례(典禮)를 받고난 후 오래 지나지 않아 접수활동을 전개하여 타이페이제국대학의학부(台北帝國大學醫學部)를 ‘국립타이완대학의학원(國立台灣大學 醫學院)’으로 개칭하고, 타이페이 병원(台北醫院)을 ‘제일부석(第一附屬)의원’으로, 타이페이(台北)적십자의원은 곧바로 ‘제이부속(第二附屬)의원’으로 고쳤다.

■전쟁 피해 복구에 전력 전쟁이후에 방치되어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百廢待擧), 본원도 전쟁 때 피해로 인한 파괴된 건물의 재건이 시급했는데, 곧 약 30억원(元)의 거금(舊台灣貨幣)을 투입하여 옛 모습을 회복하기 시작했으나 일본인 교수들이 귀국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교육과 진료에 하마터면 영향이 있을 것이나, 다행히도 한편으로는 젊은 대만 출신 의사들이 그 중임을 이어 받고, 또 다른 면에서도 일본에 방송을 하여 일본에 여행 중인 대만 출신 의사들이 귀국하여 다함께 대대병원(台大醫院) 중건 대열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본토(대만) 의원으로서의 방향이 점차 한층 명확히 되었다.

1947년 ‘국립 대만 대학 의학원 제일 부속 의원’은 ‘국립 대만 대학 의학원 부속의원’으로 개칭되었고, 제2 부속 의원도 곧 성립타이페이(‘省立台北)의원’으로 다시 짜여졌다. 1950년에 타이페이(台北) 푸쓰니엔(‘傅斯年), 교감이 일거시대(日據時代 : 식민지 시절)의 호칭을 답습한 ’부속의원‘을 ’부설의원‘으로 마침내 개명하였다. 과거 일본이 대만을 통치한 50년 역사를 지닌 타이페이(台北)의원은 전후에도 줄곧 대만 지구의 의료보건, 의학교육, 의학연구에 있어 최고의 기구였다. 그러나 60년대 이전에는 오히려 국가 경제 성장과 여러 가지 시설의 건설로 인하여 다소간 새롭게 되는 것이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시대적 감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추억이 있게 하였다.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을 확실히 결합하기 위하여, 의료제도를 한층 빠르게 현대화하게 하였다. 타이페이(台北)의원을 국가를 대표하는 가장 좋은 의원으로 만들기 위하여 확장하려고 했고, 당국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 국민도 이런 공감대와 바람을 갖도록 설득도 하였다.

■1981년 대대의원 10년 정건 계획 1981년 7월 29일에 대대(台大)의원은 장장 10년 3개월 예정의 ‘10년 정건(整建)’ 계획을 펼쳐 보였는데, 그 계획은 중앙정부가 제시한 대건설 계획의 하나에 속하였고, 동쪽 옛 부지에 짓는 새 병원은 31만여㎡의 건평이 되었다.

머지않아서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윗선에서는 장차 신축 의원과 의학원을 타이페이시 신의계획구(台北市 信義計劃區)로 이전하길 원하였다. 그러나 토지취득이 쉽지 않아서 마침내 원래 계획대로 유지하였다. 장장 10여년간의 공사기간동안, 내내 200여건의 공사 발주가 있었는데, 매월 평균 1개 공정의 공사 발주가 있었다.

공정의 방대함가 자질구레한 정도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마침내 1991년 10월 19일에 오늘날의 규모가 완성되었다. 백년이나 된 자취를 돌이켜 보면서, 내일의 타이완의 의료 미래가 능히 한층 더 찬란한 길을 갈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 

김강현 역 <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 저자 약력

쭈앙용밍(莊永明) 1942년 4월3일 출생, 타이페이시 따따오청 출신 • 현직: 1. 타이페이시 문헌위원회위원 2. 우싼리앤 타이완 사료기금 이사 3. 빠오성 문교기금 이사 4. 타이페이시 칠성전원문화기금 감사 5. 타이페이 의과대학 강사〈타이완 백년 의학사략〉 6. 사범대학 인문교육세터 강사〈타이완 가요 사략〉



■ 타이완 대학병원 상세연대기(1895년~1995년)는 상단 {PDF download}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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