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를 맞아 호를 란츄에서 라쿠치로 고치다 <34>
고희를 맞아 호를 란츄에서 라쿠치로 고치다 <34>
  • 의사신문
  • 승인 2007.12.07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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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도 여려 차례 반복되자 마침내 각막궤양(角膜潰瘍)이 생겨서 오오사카로 가서 3주간 치료하였다.

34년(1901) 봄, 삼차신경통(三叉神經痛)이 생겨나서 통증이 매우 심하자 가족인 오오타 고오마로(太田恒磨)가 크게 근심하여 전보로 다카하시의 내진을 부탁하였다.

다음날로 同氏가 왔고 요오도 호루무의 안연고(眼軟膏) 붙여서 통증은 크게 없어졌지만 궤양농이 문드러져서 그 고름이 각막으로 침잠하여 오른쪽 눈은 그 때문에 실명됐다. 그런데 왼쪽 눈 또한 작은 수포 10여 개가 생겨 시력을 크게 잃었기 때문에 2월말에 급히 기차를 타고 오오사카로 가서 다카하시에게 부탁하고자 하였다.

오오사카 우메다(梅田)정거장에 도착하니 교우 여러 사람이 마중을 나왔다. 다카하시 씨는 그 앞줄에 있었지만 조금도 그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수행자의 말을 듣고서야 크게 기뻐서 손으로 그를 더듬어 겨우 다카하시가 마중 나온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다카하시는 곧바로 두 눈을 검사하여 말하길, 오른쪽 눈은 각막이 완전히 탁해져서 고희(古稀)의 몸으로는 아마도 회복을 기약할 수 없다. 그렇지만 왼쪽 눈을 얻는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곧 다카하시의 소개로 집 한 채를 빌려서 기거하였다.처음에는 다카하시가 날마다 찾아왔다. 혹은 빠르게 혹은 느리게 사월이 되었고, 날마다 스스로 다카하시의 집에 갈 수 있었다. 유월에 이르러서 왼쪽 눈은 80% 회복되었고, 팔월에 이르러서는 전에 단념했던 오른쪽 눈 또한 물체의 형태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 오이소를 출발할 때는 매우 급한 상황이었기에 미처 후사(後事)를 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방기하고 떠났으므로 인사(人事)가 분란하여 잠시 돌아갈 것을 청하러 갔다. 그 뿐만 아니라 매년 11월중에 의원(議院)이 열리므로 다카하시에게 이러한 상황에 대해 물어보았다.

다카하시가 대답하길, 한두 달 동안은 제자인 오오다고오마로가 토오쿄오에 있으므로 종래의 요법을 상세히 적어줄 것이니 안심하고 同氏에게 맡기면 그리 근심할 것은 없다. 그렇지만 그 사이에 자연스레 좋지 않은 징조가 있으면 바라건대 오오사카로 다시 오길 바란다고 말하였다.

세척(洗滌) 기타의 약을 가지고 오이소로 돌아왔다. 곧 다카하시의 말을 따랐다. 그 후에는 이상한 징후가 없었다. 1월 중순 한기(寒氣)가 갑자기 심해졌고 비 또한 많이 내렸으며 개인 날도 날로 북풍이 강해져서 흙먼지가 연기처럼 일어나자 오른쪽 눈이 점점 나아지다가 또다시 염증의 증세가 심해졌고 왼쪽 눈은 이에 따라 시력이 약해지기에 이르렀다. 할 수 없이 의원(議院) 휴가를 청하여 1월 염여(念余: 8∼29일) 다시 오오사카로 가서 예전처럼 다카하시를 찾아가 치료를 부탁하였다.

그 후 다소 일이 있었지만 완급(緩急)의 요방(療方) 기선(機先) 잡아서 서서히 왼쪽 눈은 완전히 좋아진 것 같았고, 오른쪽 눈 또한 이에 따라 좋은 징후를 보여서, 금일에도 여러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여 10일 이내로 이 원고 쓰기를 끝내게 되었다.

이 해에 나의 고희를 축하하려고 토오쿄오의 여러 집에서 초대가 있으므로 후의(厚誼)를 거절할 수가 없어서 출경(出京)하였는데 옛날 자제 모두가 대가(大家)가 되고 매우 부귀해졌다.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이를 거행하였는데 특히 대박사 기타사토 바사부로(大博士北里紫三郞君: 일본의 만주지배를 의학적인 면에서 정당화에 노력함) 닥터 카네스기에이고로(金杉英五郞), 가와카미켄지로(川上元次郞)군 등이 대찬성하여 크게 수고하였다. 일찍이 한번도 나의 책상 앞에 있었던 적이 없는데 오히려 이렇게 큰 계획을 주창한 것은 특히 내가 감사하고 송구한 바이다.

諸氏같은 사람은 모두 토오쿄오에서 특히 대가로 불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키타사토(北里) 군은 제국현미경학(帝國顯微鏡學)을 처음 시작하였고 일찍이 프러시아 대학교로부터 대박사(大博士)의 칭호를 받았으며 전국의 의사 중 현미경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 은혜를 경시할 수 없다.

나는 금년으로 육군 봉직(奉職)의 기한이 차서 군사(軍事)에 관한 것을 면할 수 있었다. 4월 6일, 우에노(上野) 서양정양헌(西洋[靜養]軒)에서 거행하였는데 내회(來會)한 사람과 발기자(發起者)가 무려 300여 명이었고, 의가 이외에 다른 사람은 한 사람도 교류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제방사려단(諸方師旅團) 장교회의 때, 군의들이 서로 상의하여, 4월 15일을 기약하여 카이코오샤(偕行社: 육군장교 친목 단체로 2차대전 패망후 페지되었다가 다시 조직) 구단쟈카 쇼오콘샤(九段坂 招魂社 : 야스구니 신사 근처에 있는 메이유신전후 전몰군인 위령 사당임) 앞에 있음)에서 내가 군의부를 창업하고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여서 각기 창업이래 이곳에서 봉직하고 있음을 깊이 사례하고 겸해서 고희의 나이를 축하하였다.

육군대신도 또한 좌석에 있었다. 하시모토(橋本), 이시구로(石黑)남작도 내회했는데 그 사람 수가 150명이었고 함께 술을 베풀며 기쁨을 다하였다.

모임이 끝나고 오오사카로 돌아오자 다카하시씨, 쿠보다(窪田)씨, 나가에(永江)씨, 도이(土井)씨 등이 주창하여, 다행히 내가 눈병으로 오오사카에 체재하는 것을 기회로 해서 또 7월 20일이 내 생일이므로 이날을 택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토오쿄오를 따라하지 않아서 의가가 아니더라도 뜻이 있는 사람은 입회시키는 것으로 결정하였고, 다행히 내 두 눈이 모두 시력을 크게 회복하여 의사(醫事)에 관한 50년 이래의 것을 약기(略記)하여서 이것을 출판 발행하여 내회한 자에게 줄 것을 또한 청하여 왔다.

나는 그 영광을 기뻐하며 6월 17일에 원고를 시작하여 같은달 25일에 붓을 놓았다. 50년간의 일을 다루면서 기억나는 모든 것을 생각하였지만, 그 사이 세상의 연혁, 병란 등으로 백사(百事)는 생각한 바의 절반 밖에 되지 않았다.

하물며 해가 지난 것은 연월일을 상세히 하지 못했고 순서의 앞뒤나 혹은 빠진 것도 많이 않을까, 그뿐만 아니라 문장이 어지럽고 오탈이 적지 않은 것은 창졸간의 필기로 인한 것이다. 읽는 자에게 모름지기 양찰(諒察)을 부탁한다. 금일을 기하여 란츄(蘭疇)의 호를 고쳐서 이후엔 라쿠치(樂痴)라고 부른다. 

김강현 역 <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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