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16:26 (일)
희망 <9>
희망 <9>
  • 의사신문
  • 승인 2006.11.15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 장소에서 개업한 지가 20년이 지나간다. 언제 올지 모르는 환자 때문에 자리를 지키면서 20년이 지나갔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이 있듯이 20년 동안 변한 것이 너무 많다. 주위의 보이는 거리가 너무 많이 변했다. 처음 개원할 당시는 신호등도 없을 정도로 한적한 거리였고 주위는 건물이 없어 앞산이 가까이에 보였고 햇볕이 잘 들어 왔다.

지금은 없던 로타리가 생겼고 문을 열어 놓으면 차의 경적소리로 시끄럽다. 건물은 사방에 계속 지어져 주변의 산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하늘만 보인다. 나의 팽팽하던 얼굴은 여기저기 골이 패이기 시작하고 머리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잘 보이던 눈은 이제 돋보기가 아니면 보기가 힘들고, 책을 오래보기도 힘들게 되었다.

개원당시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의 품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20년 전 시작할 때 마련한 책상은 여기저기가 떨어져 나갔다. 눈에 보이는 것들도 많이 변했지만, 환자와 의사들의 마음도 많이 변했다. 의약분업이 되면서 의사들의 열정과 창의력이 많이 떨어졌다. 환자들도 의사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는 이곳에 왔다. 습관처럼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했다. 특별한 감동이 있었던 날도 없었고 특별한 사명이 있어서 이곳에 온 것도 아니다.

환자들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낀 적이 기억에 없다. 그냥 와야만 할 것 같기에 왔다. 자녀와 아내와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제는 지치기도 했고 의료현실이 짜증나기도 하고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영화 `오발탄'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는 뜻모를 말을 반복한다.

`가자' `가자' 6·25전쟁 후 암울하고 방향감각을 잃은 그 시대를 암시하는 외침이었다. 지금의 의사들 나를 포함한 모든 의사들의 외침이 아닌가 생각한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우리들이다. 이번 겨울은 더 춥게 느껴질 것이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노신의 `고향' 중에서)

그렇다. 희망은 처음부터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도 희망은 생겨난다. 희망은 희망을 갖는 사람에게만 존재한다. 희망을 믿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고 희망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실제로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이 어둠이 가면 새벽이 오고 폭풍이 지나가면 정결함과 고요가 온다.

그렇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닌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주인공 비비안리는 주먹을 불끈 쥐고 희망을 결단한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다시 떠 오를 것이다.”

이주성 <인천 이주성비뇨기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