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16:26 (일)
아름다운 '초보 인생'
아름다운 '초보 인생'
  • 의사신문
  • 승인 2006.11.08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삶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려고 열심히 살아 왔던 것 같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눌함보다는 완벽함을, 초보보다는 숙련됨을 추구하려는 마음으로 더 힘들었던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특히 젊은 날에는 초보는 싫었으나 지금까지도 초보를 못 면한것이 운전이다. 운전면허는 25년 전에 따서 운전경력은 20년이 됐지만 아직도 차선 바꾸려면 심장 박동이 상승되고 몹시 바빠진다. 혼자서는 후진을 곧잘 하다가도 누구라도 보고 있으면 핸들을 사뭇 역 방향으로 돌리기까지 한다. 그래서 남편은 맑은 정신에는 절대로 핸들을 안 준다.

차마 눈뜨고는 못 보겠나보다. 알코올의 농도가 어느 정도일 때는 할 수 없이 핸들을 나에게 넘겨준다. 이 만년 초보운전을 통해 자기 스스로 초보임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느긋한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내차를 타보고는 약간 답답하지만 편하다고 한다. 왜냐면 깜박이 켜고 들어오는 차 들여보내주고, 옆으로 차선 바꿀 때도 거의 차가 안 올 때 바꾸고 웬만해선 차선을 못 바꾼다. 그리고 과속은 더더욱 못하고…. 이런 모든 행동은 `아직도 나는 초보운전이다'라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남이 내 운전을 보면 답답하고 비웃기까지 하겠지만 나 자신은 운전하면서 화내거나 스트레스 받는 일은 거의 없다. 흐름의 방해가 안 될 정도로 운전하면서 `나는 초보야' 하는 겸손한 마음이 훨씬 편해지는 초보 특유의 큰 장점임을 나이 들면서 터득하게 되었다. 또 하나의 초보인생은 나의 기억력에 대한 것인데 몇 년 전만 해도 전화번호, 약속을 머릿 속에서 다 외우고 있다고 자만하다 몇 번 아찔할 정도의 실수를 한 후에는 약속을 바로 핸드폰에 입력하고 꼭 해야 할 일을 즉시 처리하게 됐다.

한번은 친구와 약속이 있었는데 그만 기억력을 믿어버리고 말았다. 그 시간 늦잠에서 일어난 나는 느긋하게 세수를 하고 있었으니 기억 자체가 완전히 지워져버린 꼴이다. 오지 않는 나를 기다리던 친구에게서 전화 받고서야 그 약속이 떠올랐으니 결국 기억력에 대한 모든 신뢰를 포기해야 했다. 이제는 휴대전화 때문에 전화를 못 받았다거나 따위는 핑계가 되지 않는다. 그때 나는 시험에 늦게 간 것만큼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아찔함을 경험했다. 그리고 기억력에 대한 기대를 포기해버리고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메모하는 습관을 갖기 시작했다. 우선 매일 보는 달력에 처리해야 하는 일을 순서대로 쓰는 것이 기본이다. 그리고 매년 끝까지 붙어있는 마지막 장에는 연중 계획들을 메모해 두는 것이다.

월간 계획은 그 달의 마지막 줄에, 주간 계획은 그 주의 마지막 공간에 쓰는 식이다. 특히 여자로서 해야 하는 이불, 베개 등의 빨래는 오래 지나면 잊기 십상이다. 이런 것들까지 꼼꼼히 메모해 둔다. 수첩에도 다양한 메모들이 빼곡하다. 좋은 날, 기억해야 할 날 뿐만 아니라 친구에게서 들은 Y담을 비롯해 재밌는 이야기 등을 정리해둔다. 남들은 흉보지만 이렇게 해야 누군가에게 다시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하지만 이런 기록들이 쌓이니 이것이 바로 생활의 지혜가 됐다. 그리고 친구에게 전화하기, 송금해야 할 사항, 납부할 돈은 생각나면 바로 처리한다.

이 모든 것이 나의 기억력과 일처리가 나이 들면서 반비례된 결과라는 것을 인지했기에 초보의 생활태도로 살고자 했고, 그 덕에 여유와 느긋함을 부가로 얻은 것이다. 초보의 생활에서 나아가 바보 같은 삶이 훨씬 편한 삶이라고 삶의 굴곡이 컸던 선배님께서 말씀해주신 적이 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고자가 아니고 섬기려고 오셨다고 하지 않았던가.

초보인생도 분명히 아름다운 인생임을 다시금 깨달아본다. 또 다른 행복한 노후를 위한 숫자의 법칙을 어느 책에서 읽었다. `1, 10, 100, 1000, 10000'인데 하루에 한 가지씩 좋은 일을 하고, 하루에 열사람을 만나고, 하루에 백자를 쓰고, 하루에 천자를 읽으며, 하루에 만보씩을 걸으라는 의미다. 그러면 `9988234'가 된단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고 이삼일만 앓다가 나흘째 되는 날 죽는다는 뜻이다. 우리 모두 `초보인생'과 `1, 10, 100, 1000, 10000'으로 살고 `9988234'됩시다!!






조승복<용산구의사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