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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병엔 키니네 <26>
열병엔 키니네 <26>
  • 의사신문
  • 승인 2007.03.27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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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를 구한 나무껍질

1692년 청 황제 강희제(康熙帝)가 말라리아에 걸렸다. 그의 치세 31년 되는 해였다. 프랑스 선교사와 포르투갈 선교사가 먼저 정제를 써서 병세를 좋게 했지만 말라리아의 특성상 다시 도져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 때 프랑스 선교사 퐁타네이(P. Joanes Fontaney)가 인도에서 보내온 킨코나 나무껍질을 황제에게 보냈다. 처음 보는 약을 황제에게 바로 올릴 수는 없는 법. 말라리아에 걸린 다른 환자들에게 먼저 먹여 보니 큰 효험을 보았고, 그냥 조금씩 먹어 본 대신들도 별 탈이 없었다. 강희제도 이 약을 먹고 바로 나았다. 그는 키니네를 `성약(聖藥)'이라 할 정도로 칭송했다.

강희제를 성공적으로 치료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황성(皇城) 안에 큰 건물을 하사받았으며, 이후 강희제의 도움으로 서양 의학 도입의 길이 열렸다. 중국인들은 한자 음을 따서 금계랍(金鷄納, 金鷄蠟)으로 불렀는데, 18세기 중엽 이후 중국 내 의서에는 키니네를 소개한 것들이 보인다.

키니네, 조선에 들어오기까지

서양의 약으로만 알려진 키니네는 남미 페루지역에 사는 고대 잉카인들이 이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스파니아가 잉카를 식민지로 만든 뒤에 에스파니아의 백작부인 친콘(Cinchon)이 그 효과를 보고 이를 유럽에 들여왔다는 설 때문에 킨코나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정제된 키니네를 복용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약재는 서양에서나 동양에서나 전통적으로 생약을 그대로 사용해왔다. 생약학은 식물학의 한 분과에 속했다. 그러나 18∼9세기 유럽에서 화학의 발달은, 생약의 성분을 규명하고 이를 추출·분리하거나 합성하는 생약학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키니네의 추출도 이러한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약사 피에르 펠레티에(Pierre Joshep Pelletier)와 조셉 카방투(Joshep Bienaime Caventou)는 병원 약국에서 만나 함께 연구하기 시작해 에메틴, 스트리키닌, 브루신, 카르민, 클로토닌산 등을 분리해냈다. 특히 1820년에는 킨코나 나무 껍질에서 키닌과 킨코닌을 분리해내는데 성공했으며, 나아가 그 제조방법을 공개하여 공장에서 생산하는 길을 열었다. 유럽 각지에서 말라리아의 신약인 키니네를 제조하는 공장이 늘어났고 19세기 말 `세창양행(世昌洋行)'이란 간판으로 조선에 들어선 독일 무역상도 이렇게 만들어진 키니네를 팔았다.

열병의 상식, 키니네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보면 `우두법이 나와 어린아이들이 잘 자라고 금계랍이 나와 노인들이 수(壽)를 누린다'는 유행가가 널리 퍼졌다며 당시 키니네의 효과가 민간에 얼마나 널리 알려졌는지 확인할 수 있다. 제중원에서도 인기리에 판매된 약이 바로 키니네였는데 미국에서 수입해다 팔았다. 키니네의 효과는 기존의 한방약에 비해 너무나 뛰어나 근대 한국인들의 머리 속에 열병엔 `금계랍'이라 할 정도로 상식이 되었다. 서양의학에 대한 조선인들의 경계심을 푸는데 한 몫을 한 것이다.
 

 

  이흥기 <서울대병원 병원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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