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20:55 (금)
성난 사람들, 성난 의사들
성난 사람들, 성난 의사들
  • 홍영준(원자력병원 진단검사의학과)
  • 승인 2024.02.14 10: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릉역 2번 출구 (98)

영어 단어 ‘beef’가 흔히 먹는 ‘소고기’ 말고 ‘불평(complain)’이란 뜻으로도 쓰인다는 걸 최근에 배웠다. 심지어 속어로 ‘싸움(fight)’이란 의미까지 있다고 한다. 얼마 전, 소위 미국 TV 방송계의 최고상이라는 에미상을 휩쓴 드라마, <성난 사람들>의 원제가 <Beef>였기에 사전을 찾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문득 어원이 궁금해졌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몇몇 자료에 따르면 아무래도 군대에서 부식으로 나오는 소고기와 관련 있어 보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군납비리 혹은 군수비리는 뿌리가 깊다. 부대에 특식이랍시고 어쩌다 소고기가 지급되면 대대장부터 시작해서 계급 순서대로 줄줄이 주요 부위를 다 떼간다. 막판에 사병들은 남은 게 없어 그냥 물 붓고 무 썰어 넣어 맹탕 고깃국을 끓인다. 예전에 한국 군대에서 많이 듣던 이야기다. 영어권에서도 마찬가지였기에 소고기의 질이나 양에 ‘불평’을 쏟아놓고 때로는 ‘싸움’까지 벌이던 옛 군인들의 짜증과 울화가 ‘beef’란 단어에 담긴 것 아닐까.
  
원제도 독특하지만 그걸 ‘성난 사람들’로 번역한 솜씨 또한 예사롭지 않다. ‘화나다’란 말을 쓸 때의 ‘화(火)’는 한자어고 ‘성나다’의 ‘성’은 순우리말이란 이유로 단순히 그렇게 번역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이 일상어로 훨씬 더 많이 쓰는 ‘화나다’를 두고 굳이 ‘성나다’로 제목을 붙인 데에는 좀 더 깊은 뜻이 있었으리라 믿고 싶다.
  
성이 나는 것은 화가 날 때보다 훨씬 강도가 세다. 예컨대 배가 고파서 ‘화’가 날지언정 ‘성’이 난다고 말하진 않는다. 반면 뭇사람들의 마음에 분노의 불길이 치솟을 때 ‘화난 민심’이라 하기보다는 ‘성난 민심’이라 표현하는 게 제격이다. 드라마 <성난 사람들>에는 단순히 화가 난 사람들이 아니라 미국 사회 미묘한 차별과 부조리에 성이 난 사람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리고 오늘 대한민국의 의사들 역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성을 내고 있다.
  
졸지에 ‘의대 정원 연간 2,000명씩 증원’은 정부가 기필코 달성해야 할 국정의 최고 목표가 되어 버린 것 같다. 복지부 고위 관리들이 나서서 의사 집단을 향해 온갖 협박과 공갈 그리고 모욕을 서슴지 않는다. 여론을 등에 업었다는 오만이 그런 무리수를 두게 하나 보다. 의대 정원 확대로 이공계 인재 블랙홀이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복지부 장관은 천연덕스럽게 속내를 드러낸다. 단기적으로는 의대 쏠림이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의사의 기대소득이 낮아져서 무조건적 의대 지원 현상이 해소될 것이라고. 의사 소득을 낮추기 위해서라면 대한민국 이공계는 한 5, 6년간 망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고, 또 이 정책에 반발하는 의사들은 오직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기적인 자들이란 뜻 아닌가.
  
정부는 이른바 ‘필수의료’와 ‘지역의료’를 살리겠다는 것을 이번 의대 정원 늘리기의 주요 취지로 말한다. 뇌혈관 전공자가 없어서 응급수술 못 받는 일이 없도록 하고, 지방 오지 주민들도 의료서비스에서 소외되지 않게 하겠다는 데 반대할 국민은 없으리라. 그런데 그런 의료 유토피아가 단지 의사 숫자를 늘리면 곧 도래하리란 생각은 환상에 가깝다. 기피 과에 대한 근본적 지원과 법제도의 보완 없이, 또 지방의 균형적 발전과 의료기관 이용에 관한 국민의 의식 전환 없이, 의대 정원의 대폭 증원만으로 필수의료, 지역의료가 바로 서리라 믿는 복지부 관리가 정말 있을까 궁금하다.
  
몇 년 전 우리병원에서 가장 실력 있고 가장 열정적으로 환자를 보던 소화기내과 후배가 사직했다. 불의의 의료사고로 무려 7년을 끌어오던 재판에서 집행유예 금고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인근 의원에서 대장내시경을 받다가 천공이 생긴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때 그 후배가 가장 먼저 달려갔다. 본인의 특기인 내시경을 이용한 클리핑으로 천공 부위를 막으려던 중 환자는 심정지가 발생했고, 불행히도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 법정에서 환자 보호자에게 온갖 수모를 받고 결국 금고형 판정을 받은 후배는 공공기관 규정에 의해 우리 병원을 떠나야만 했다. 작년 말 개정된 의료법에 따르면 이제 금고 이상의 형은 무조건 면허 취소다. 그 후배가 지금도 응급실에 천공 환자가 오면 만사 제쳐두고 달려갈지 미지수다. 필수의료 전공이 이렇게 의사 면허를 걸고 하는 일이어서야 되겠는가.
  
오늘 SNS에 흉부외과 후배가 어이없다면서 댓글을 하나 공유했다. 고혈압 때문에 서울 S대 병원에 10년째 다니고 있다는 한 지방 환자의 글이었다. 그 환자는 아침에 기차 타고 매번 일찌감치 서울에 올라가야 하는데 의대 증원하면 자기 같은 시골 사람들이 많은 혜택을 볼 것 같아서 좋다고 했다. 아마 비슷한 인식을 가진 국민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의대 증원으로 무슨 혜택을 기대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분들이야말로 의대 증원의 효과가 지역의료 살리기에 무용지물일 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의사들은 지금 정부, 특히 복지부 관리들에 대해 성이 나 있다. 물론 의료계 이슈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정부 여당 전체에 대해 분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진지하게 성을 내고 오해를 풀어야 할 대상은 어쩌면 공무원들을 저토록 안하무인으로 만든 국민 여론일지 모른다. 포퓰리즘의 토양을 제공하는, 무책임하거나 이기적인 여론 말이다. 
  
이제 정부에 대한 의료계의 집단적 반발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행여 파업이라도 하게 되면 국민들이 이번엔 의사 집단을 향해 성을 낼 것이다. 국민은 의료의 공공성을 이야기하며 의료인의 양심을 주문할 테고, 의사들은 전문가에 대한 존중과 인정을 요청할 것이다. 
  
드라마 <성난 사람들>의 결말은 서로를 죽일 듯 미워했던 남녀 주인공이 맹렬한 싸움 끝에 둘 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면서 맞는 극적 반전이다. 피폐해진 육신으로, ‘Catch-22(모순적 상황 또는 딜레마)’를 이야기하다가 마침내 서로를 보듬고 이해하게 된다. 영혼 없는 공무원들의 망언에 너무 에너지를 빼앗기지 말고 그럴수록 의사들은 국민들 마음에 다가가도록 노력하자. 얼핏 보면 모순적 상황이지만 끊임없는 설득과 토론을 통해 기어이 서로를 보듬고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한다면 상처 치유의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