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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ving Las Vegas- 연재를 마치며, 의료계에 대한 고언(苦言)
Leaving Las Vegas- 연재를 마치며, 의료계에 대한 고언(苦言)
  • 배준열 기자
  • 승인 2024.02.06 09:0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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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71)

“절대로 나에게 술 그만 마시라고 말하지 마(You can never, ever ask me to stop drinking).”  작가 벤은 알콜중독으로 직업과 가족을 잃고, 술을 마셔서 자살하기 위해 전 재산을 털어 라스 베가스로 간다. 거기서 벤은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매춘부 세라를 만난다. 세라와 벤은 동거하기로 하면서 딱 하나씩을 조건으로 내건다. 세라는 자신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 벤은 절대로 술 그만 마시라고 말하지 않는 것.

그러나 세라는 벤을 사랑하게 되면서 그와 더 오래 함께하고 싶어진다. 점점 죽음으로 치닫는 벤에게 세라는 술을 그만 마시고 치료받자고 말한다. 벤은 세라가 약속을 어겼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세라에게 상처를 주는 언행들을 한다. 하지만 벤 역시 세라를 사랑하고 있었고, 벤은 임종 직전 세라를 불러 깊은 사랑과 감사의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1995년작 영화 “Leaving Las Vegas”는 운명적 사랑에 관한 서정적 묘사, 그리고 Sting의 OST “Angel Eyes”로 젊은 시절의 필자에게 강렬한 기억을 남겼다. 

이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한 무렵 친한 의사가 조언했다. “변호사님, 의사 까는 글은 조심해서 쓰셔야 돼요.” 의사들의 강한 자존심을 잊지 말라는 솔직한 충고였다. 그 때문은 아니지만, 이 칼럼을 연재하면서 필자는 의료계에 ‘술 그만 마시라고 말하는’ 글은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무리한 입법과 정책으로 이미 힘들어하고 있는 의료계에, 시어머니 잔소리 같은 글을 보태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라가 벤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된 것처럼, 필자 역시 의료계를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세라가 약속을 어기고 벤에게 술을 그만 마시라고 말하게 되었듯이, 연재를 마치는 이번 글에서는 필자 역시 원칙을 깨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의료계에 대한 고언(苦言)을 적어보고자 한다.

‘가라앉아라.’  의료계는 대체불가능한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의료 관련 이슈가 정치화되면 강점인 전문성을 살릴 수 없게 된다. 수술실 CCTV법을 보자. 대리수술 사건, 수술 중 환자 사망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지만, 처음에는 개별적인 사건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동조 여론이 형성되자 언론들은 이를 ‘수술실의 비공개성’ 이슈로 끌어올렸다. 표 냄새를 맡은 정치권은 이를 더 끌어올려 CCTV 설치를 기정사실화했다. 부득이 수술실 외부 설치로 타협이 이뤄졌는데, 더 크게 정치적 이슈화되면서 결국 수술실 내부 설치로 법이 개정되었다.

반면 법 개정 이후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2년의 유예기간 동안, 의료계와 보건복지부는 시행규칙 개정을 위한 실무자급 협의를 진행했다. 이때에는 여론의 관심이 식어 논의 단계를 낮출 수 있었기에, 의료계는 전문성에 기초하여 현실적 우려들을 전달했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 반영되었다.

물론 표를 의식한 국회와 정부, 클릭수를 원하는 언론들은 의료계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의료계는 이슈의 정치화를 피하기 위해 잠수함처럼 가라앉아야 한다. 의료계는 ‘우리와 논의하자’는 열린 태도로 협상 테이블에 일단 상대방을 앉히고, 이슈를 쪼개고 아래로 내려서, 최대한 낮은 단계에서 전문성을 무기 삼아 논의해야 한다. 잠수함은 물 밑에서 보이지 않을 때에는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물 위에 떠 있을 때에는 손쉬운 표적에 불과하다. 의료계 역시 실무적 단계의 논의에서는 그 전문성을 존중받지만, 정치적 표적이 되면 여론의 폭격 앞에 더없이 연약할 뿐이다. ‘투쟁’은 수없이 입을 들락거리는 아이들 막대사탕이 아니다. 승산이 확실할 때에만 입에 올려야 한다.

‘밖을 보라.’  20년 전에 의협 이사를 역임한 분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당시 의협 주도의 차트 프로그램, 의협이 주도하는 의학정보 관리기관 등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의협에 들어왔다. 그런데 관련 위원회 위원들이 이해상충이 될 수 있다는 의협 밖의 반발이 있었다. 논란이 있자 추진력을 얻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현재 의료계의 상황은 20년 전과 달라진 것이 있는가? 20년 전에 일부 회원이 반발했던 ‘의학정보 관련 이해상충’은 지금의 정보화 수준에서 보면 이해상충 자체가 되지 않거나 우스운 수준이었을 것이다. 20년 ·전 우리나라의 정보화 태동기에, 의료계가 ‘의학정보 생성자인 의사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한’ 당연하고 시의적절한 의사결정을 내렸다면, 현재 의사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는 상당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기술과 정보가 새로이 창출해 낸 혁신적이고 광대한 세상에서 지난 20년간 의료계가 이룬 일은 너무나 부족하다. 의료계가 밖을 보지 않고 ‘옵세하게’ 내부적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있는 사이에, 개구리의 뒷다리는 이미 반쯤 삶아져 버렸다.

‘의사들이여, 참여하라.’  간호법 파동 당시, 필자가 의협 이사임을 잘 알고 있는 변호사가 필자에게 한 말이 있다. “의사들한테 댓글 좀 달라고 하세요. 간호사 말이 다 맞는 것 같잖아요.”  당시 의료계 입장을 알리기 위해 종이신문들에 광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1억 원이 넘게 드는 신문 광고보다도, 14만 회원들이 ‘1일 1댓글’을 다는 것이 여론전에서 백 배, 천 배의 효과가 있다. 하지만 잘 아시다시피 회원들의 참여는 민망한 수준이고, 심지어 ‘파업’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의협은 검찰처럼 법적 권한을 부여받아 그 자체로 힘이 센 단체가 아니다. 의협은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는 14만 회원들이 참여할 수 있기에 ‘힘이 셀 가능성이 있는’ 단체일 뿐이다. 어떤 단체도 그 구성원들의 참여의 총합 이상의 힘을 가질 수 없다. 회원들의 관심, 참여, 회비가 없다면, 의협은 단순한 상징에 불과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마 의료계를 거쳐 간 다른 변호사들도 비슷한 조언을 주었을 것 같다. 그래도 연재를 마치며 마지막 글을 기고하는 필자로서, 그리고 임기가 2개월 남은 의협 법제이사로서 드리는 조언이니 한 번쯤 고민해 주시면 감사할 것 같다. 5년 7개월간 ‘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를 읽어 주신 독자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바람 잘 날 없는 대한민국 의료계에는 항상 이슈들이 끊이지 않는다. 이에 관해 쓴 글들을 모아 다음달 출간을 예정하고 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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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석 2024-02-07 08:16:47
멋진 글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