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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그저 추억일 뿐이지만
과거는 그저 추억일 뿐이지만
  • 홍영준(원자력병원 진단검사의학과)
  • 승인 2024.01.23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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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97)

스승에게 야단맞고 걸상 위에 거꾸로 서기 벌을 받던 빡빡머리 소년. 힘겨워하더니 급기야 머리를 의자에 쿵 찧고 나동그라진다. 정수리가 깨져서 피가 주르륵 흐르는데… 아이는 그것도 모르고 혼자 중얼거린다. “왜 이렇게 땀이 뜨겁지?”
  
서극(徐克)을 비롯하여 홍콩 영화계를 대표하는 7인의 유명 감독이 각각 10여 분씩의 짧은 영화를 제작한 다음 옴니버스 형식으로 한데 합쳤다. 이 영화, <칠중주(Septet): 홍콩 이야기>는 2020년 부산영화제 개막작이었고 국내에서는 작년 봄 개봉했다. 최근 나는 이 영화를 인터넷에서 내려받아 여러 차례 다시 보았는데, 물구나무서다가 머리 깨지는 아이는 그 가운데 첫 번째 영화인 <수련(修鍊, Exercise)>에 등장한다.
  
뚱뚱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날렵한 무술 실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 홍금보가 메가폰을 잡은 <수련>은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다. ‘경극 학교’라 불리던 일종의 무술 연기 지도학원에서 훈련 시간에 요령을 피우다 들켜 혼나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대표로 벌 받는 반장 아이는 바로 어린 시절의 홍금보 자신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백발이 성성한 현재의 홍금보가 직접 나와 “시간은 쏜살같고 되돌릴 수 없다. 과거는 그저 추억일 뿐”이라고 나직이 읊조린다. 노인 홍금보의 정수리 흉터를 카메라가 클로즈업하면서 관객은 그제야 그 머리통 깨진 아이 이야기가 실화였음을 깨닫는다.
  
최근 가족과 주말 홍콩 여행을 다녀온 나는 귀국 후 뭔가에 홀린 듯 홍콩 영화를 이것저것 마구 찾아보기 시작했다. 홍콩섬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침사추이 바닷가 ‘스타의 거리’에서 느꼈던 감흥이 쉬 사그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만옥, 양조위, 이연걸, 왕조현, 장국영 등등, 이름을 얼핏 듣는 것만으로도 열정 넘치던 내 인생의 어느 한 시절이 눈앞에 왈칵 쏟아져 내리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었고, 그들의 핸드프린팅 부조에 내 손을 가지런히 포개면서 한때의 영웅이자 애인이었던 이들의 아스라한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나와 비슷한 세대 남자들이 홍콩 영화, 홍콩 배우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허세와 치기 가득하던 사춘기 시절, ‘아뵤’ 소리와 함께 플라스틱 쌍절곤을 휘두르며 이소룡 흉내를 냈고, 상의 한쪽 소매에서 팔을 뺀 채 빈 소맷자락을 펄럭이면서 외팔이 왕우 시늉에 진심이었으며, 온갖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성룡의 취권을 따라 하지 않았던가. 이후 무협 액션 영화에 질릴 때쯤 등장한 주윤발은 왜 또 그리 멋지던지, 너도나도 ‘홍콩 느와르’의 주인공인 된 양, 우수에 찬 얼굴로 성냥개비를 씹어대지 않았던가.
  
1997년 중국에 반환된 이후 현지에서 느낀 21세기 오늘의 홍콩은 과거의 영광과 거리가 있었다. 관공서를 비롯하여 어디든 나란히 게양된 중국 오성홍기와 홍콩 깃발이 상징적이었다. 항상 중국 국기가 더 크고 더 높게 걸려있는 모습에서 지난날 우리를 그토록 즐겁게 해주었던 홍콩 영화가 다시 한번 꽃을 피울 날은 까마득해 보였다. 이민 가는 시민들이 는 것처럼 배우들도 홍콩을 많이 떠나 60대, 70대 배우가 젊은이 역할을 하는 경우도 흔하다고 한다. 
  
<칠중주: 홍콩 이야기>를 구성하는 여러 작품에 공통으로 흐르는 정서는 ‘옛날 좋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다. 외국인인 우리도 그때가 그리운데 홍콩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과거는 그저 추억일 뿐’이라는 홍금보의 독백에서 무기력함과 애잔함이 묻어난다. 마치 그런 추억을 앞으로는 만들기 어려울 것 같다는 가슴 아픈 예감인지도 모르겠다. 과장과 허풍이 가득했지만, 인간의 희로애락을 솔직하게 드러냈기에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던 그 홍콩 영화가 사라져 간다. 우리나라 젊은 세대가 홍콩 영화의 정서를 느껴볼 기회가 더는 없을 것 같아 씁쓸하다.
  
기억 가운데 우리의 감정 혹은 감각과 유독 밀접히 연결된 것들을 ‘추억’이라고 부른다. 단순히 뇌세포가 기억하고 있는 사실만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이 머금고 있는 기쁨과 슬픔, 때로는 후회와 욕망 따위의 감정, 게다가 그 사실에 묻어있는 냄새와 촉감, 혹은 음악 같은 오감 자극 요인을 대번에 소환하는 작업이 바로 추억을 회상하는 일이다. 추억의 홍콩 영화, 추억의 홍콩 배우들은 꺼내 볼 때마다 아직도 설래임을 느끼게 하며 동시에 ‘굿 올드 데이즈’란 말을 저절로 떠오르게 한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괴로움과 미래의 불안마저 잠시 잊게 하는 추억의 순기능 아닌가.
  
생성형 인공지능이 새로 등장할 때면 난 매번 그 역량을 가늠하기 위해 글짓기를 시켜본다. 홍콩에 대한 상념에 빠져 있다가 문득 이번엔 구글의 바드(Bard)에게 ‘굿 올드 데이즈’를 주제로 짤막한 에세이를 써보게 했다. 감성이 돋보이는 문장을 기대했으나 결과물은 투박한 자기계발서를 닮았다. 그래도 참신한 건 ‘굿 올드 데이즈’를 과거로 국한하지 말고 매일매일을 그렇게 만들어 가라고 권하는 내용이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라, 자신의 취미를 즐겨라, 그리고 자연을 만끽하라. 이 세 가지가 인공지능 바드의 조언이다.
  
과거는 그저 추억일 뿐이지만 그 추억은 동산, 부동산 못지않게 인생의 중요한 자산이 된다.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자산은 틈틈이 내 힘으로 조금씩 불려 나갈 때 의미가 있다. 과거에 봤던 홍콩 영화가 내게 소중한 추억이듯이 가족과 함께 한 이번 홍콩 여행은 바드의 조언에 걸맞게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한 현재의 추억 만들기였다. 거기에 취미로 홍콩 맛집 찾아다니기와 홍콩 항구의 멋진 풍광 감상하기를 보태면 바드의 요구사항을 딱 맞추는 셈이다. 
  
홍콩섬 센트럴 지역 어느 좁은 산동네 위로 무려 800미터가량 길게 설치된 에스컬레이터를 타보고 와서는 아이들과 함께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살던 집이 그 에스컬레이터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본인들의 체험과 영화의 스토리, 그리고 멋진 영화음악이 어우러지니 아이들도 옛 홍콩 영화에 관심을 가진다. 드디어 내 추억 자산 하나가 상속세나 증여세 없이 자녀들에게 전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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