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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퇴마록
나의 퇴마록
  • 홍영준(원자력병원 진단검사의학과)
  • 승인 2024.01.09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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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96)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은 교대를 갓 졸업한 젊은 여선생님이셨다. 그해에 시집을 가셨는데,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면서 보고 온 영화를 학생들에게 자주 이야기해주셨다. 한 번씩 분위기를 타면 교과서를 팽개치고 아예 할리우드 최신 영화 이야기로 수업을 대신하기도 했다. <대부>, <스팅>, <007 죽느냐 사느냐> 등은 스크린이 아닌 구전으로 그때 내가 처음 접했던 영화들이다. 그 가운데 단연 압권은 선생님의 제스처와 말만으로 반 아이들 전체가 공포에 떨었던 <엑소시스트>였다. 
 
악마에게 사로잡힌 소녀의 기괴한 행동을 선생님이 세세히 묘사할 때 아이들은 비명을 질렀다. 방안의 가구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상처투성이 얼굴로 흉측하게 변한 소녀가 침대 위로 스르르 떠올랐다가 갑자기 목이 180도 휙 돌아가면서 저주의 욕설을 쏟아놓는 장면. 당시 선생님의 성대모사가 얼마나 무시무시했던지 나중에 실제로 접한 영상이 오히려 싱거울 정도였다. 자기 목숨을 걸고 악령과 맞서 싸우는 신부님들을 ‘엑소시스트’라 일컫는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았다.
 
1990년대 중반 현대자동차에서 근무하던 한 평범한 직장인이 PC 통신 하이텔에 연재하여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판타지 소설이 있다. 나중에 책으로 발매된 이후 지금까지 총 누적 판매 부수가 천만 권이 넘어간 초대형 베스트셀러. 내 군의관 시절의 밤을 흥미진진하게 해주었던 그 소설이 바로 이우혁의 <퇴마록>이다. 여기서 이현암과 박 신부를 포함하여 초능력을 지닌 4인의 주인공을 ‘퇴마사’, 곧 ‘악마를 쫓아내는 사람’으로 부른다. 아마 ‘엑소시스트’의 일본식 번역인 듯한데, 한국 천주교에서는 ‘퇴마(退魔)‘ 대신 ’구마(驅魔)‘란 말을 쓴다.
 
초등학교 때의 공포영화와 군의관 시기의 판타지 소설이 내 기억 속에서 한꺼번에 갑자기 소환된 이유는 지난 연말의 한 뉴스 때문이다. 사위가 폐암으로 노원구의 종합병원에 입원 중이던 장모에게 불을 붙였다가 1심 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는 뉴스. 이 보도는 40대 사위의 엽기적인 주장으로 인해 더욱 주목을 받았다. 사위의 말에 따르면 라이터로 휴지에 불을 붙여 장모에게 던진 까닭이 이른바 ‘퇴마의식’ 때문이었다고 한다. 거의 모든 언론은 이 ‘퇴마의식’을 기사의 헤드라인으로 뽑았다.
 
선고는 12월이었지만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작년 5월 말이었다. 장모는 두피와 얼굴, 목과 손에 2도 화상을 입었고 병실 커튼과 침대에도 불이 옮겨붙었다. 스무 대가 넘는 소방차가 출동하여 화재를 진압하느라 병원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언론엔 나오지 않았지만, 나의 상세한 기억이 증명해주듯이 이 화재가 일어난 곳은 바로 우리 원자력병원이다.
 
법원이 판단한 바와 같이, 사위에게 장모를 심각하게 해칠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따금 장모의 간병을 사위가 맡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퇴마의식은 도대체 왜 하려고 했던 걸까? 정말로 그는 장모의 나쁜 병이 악령이나 귀신의 짓이라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사악한 존재를 떨쳐내기 위해 무속인들이 종종 이용한다는 ‘화전치기’처럼, 불의 힘을 빌려 말기 암을 낫게 해보겠다는 애절한 몸부림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사위의 의도를 나쁘게 볼 여지도 꽤 있다. 술을 좋아했던 사위는 그 때문에 장모로부터 꾸지람을 자주 들었고 사건이 있던 날도 말다툼을 벌였다고 한다. 법정에서는 자기가 평소 우울증약을 복용하기에 불이 난 시간에도 심신미약 상태였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왠지 진실을 감추려는 인상이라 석연치가 않다. 나는 질병을 일으키는 악마가 자기 장모 몸에 붙어있다는 따위의 말은 믿지 않지만, 인간의 이중성을 드러나게 하는 악마가 그 사위 안에, 또 우리 안에 있음은 잘 알고 있다.
 
영화 <엑소시스트>와 소설 <퇴마록>의 악마들은 사악한 존재로서 인간의 몸에선 퇴출의 대상이다. 주로 능력 있는 퇴마사와 구마 사제들이 이 일을 감당한다. 하지만 그 악마 같은 존재가 도저히 나 자신과 분리되지 않는 ‘또 다른 나’라면 일회성의 전격적인 퇴출 작전은 번번이 실패할 게 뻔하다. 문득 체로키 인디언의 두 마리 늑대 우화가 떠오른다.
 
분노, 시기, 질투, 탐욕, 거짓 등으로 무장한 ‘악한 늑대’와 평화, 사랑, 친절, 공감, 진실 등을 소유한 ‘착한 늑대’ 두 마리가 우리 내면에 존재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기느냐고 손자가 묻는다. 익히 알려진 할아버지의 모범답안이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기지.”  

새해 벽두에 다시 정독한 책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였다.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를 소재로 글을 하나 쓰려다가 불현듯 떠오른 작품이었다. 인간의 철저하고 본질적인 이중성을 깨달은 헨리 지킬은 선과 악의 요소를 분리하여 별개의 두 실체에 들어가도록 하는 약을 만든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모든 참기 어려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악랄하고 비열하고 자기중심적인 짐승 같은 인간, 에드워드 하이드는 이렇게 탄생한다. 처음에 왜소했던 하이드는 점점 몸집이 커지고 더욱 사악해지다가 마침내 지킬 박사로 되돌아오는 과정마저 난항을 겪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이우혁의 <퇴마록>은 용감한 퇴마사들이 온 세계를 다니며 악마를 쫒아내는 기록을 담았지만, 올해 쓰고 싶은 나의 퇴마록은 내 안의 악마, 내 안의 악한 늑대, 내 안의 하이드씨와 싸우는 이야기다. 한두 차례로 끝나는 싸움이 아니기에 어쩌면 평생 이어질 피곤한 일기가 될 것도 같다. 자신의 믿음을 전파하고자 전력을 다했던 기독교 신앙의 거인, 사도 바울조차 탄식하는 싸움이었다는 데에서 위로와 도전을 함께 받는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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