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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감사, 그리고 기적
슬픔, 감사, 그리고 기적
  • 홍영준(원자력병원 진단검사의학과)
  • 승인 2023.11.07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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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93)

민시우군은 현재 제주도 장전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다. 유치원을 졸업하기 직전 엄마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우의 아빠는 아내가 폐암 진단을 받았을 때 곧바로 제주도로 이사를 했다. 아름다운 제주 애월의 숲속에서 자연이 주는 치유의 힘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우 엄마는 아들에게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남긴 채 가족 곁을 떠나고 말았다. 엄마가 보고 싶어 밤마다 아빠 품에서 서럽게 엉엉 울던 어린 소년은 어느 날 영화감독인 아빠의 권유로 일기와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우의 눈물은 조금씩 조금씩 그리움의 시어(詩語)로 승화되어갔고 아빠는 그 과정을 차분히 영상에 담았다.
  
시우 아빠가 카메라에 담은 영상 기록들은 지난주 <약속>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국내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나는 시우의 동시집을 출간한 출판사 대표님의 초대로 개봉 며칠 전 그 시사회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무대 인사하러 제주도에서 올라온 시우 부자의 얼굴을 거기서 처음 보았고 힘든 시간을 거쳐온 그들의 육성을 들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비는 매일 운다 / 나도 슬플 때는 / 얼굴에서 비가 내린다 / 그러면 / 비도 슬퍼서 눈물이 내리는 걸까?”
  
아빠가 시우의 재능을 발견한 첫 번째 시 <슬픈 비>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후로도 시우의 시에는 해와 달, 바다와 별, 눈과 구름, 나무와 숲 등등 제주의 자연이 소복하게 등장한다. 아빠가 카메라로 담아내는 것처럼, 실제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광이지만 다들 슬픔을 머금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엄마가 오버랩 되기 때문이다
  
“엄마! 오늘은 저번보다 벚꽃이 많이, 진짜 엄청 많이 폈어요. 저는 그래서 제가 죽을 때 봄이었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벚꽃을 손에 들고 엄마한테 선물 주고 싶기 때문이에요.”
  
아직 어린 초등학생이 자기의 죽음을 담담히 언급하며 써놓은 일기를 보면서 눈물짓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시우가 동시집을 처음 내고 지난여름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 초대를 받았을 때 사회를 보던 유재석과 조세호는 시우의 이날 일기를 듣다가 목이 메어 한동안 진행을 못 했다.
  
영화 <약속>을 보면서, 그리고 실제로 시우 부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서, 나 역시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어떻게든 아이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싶어 하는 아빠의 간절함이 고스란히 내게 전달되었고, 시와 편지만으로 슬픔을 달래기엔 엄마의 부재(不在)가 너무 커서 아빠의 농담에 잠시 웃다가도 결국 베개를 뒤집어쓰고 통곡하는 시우의 모습이 참으로 애처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큰 슬픔, 큰 아픔은 어린 초등학생이 죽음을 넘어선 ‘영원’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된다.
  
“하루는 끝이 있지만 / 영원은 끝이 없어 // 생명은 끝이 있지만 / 희망은 끝이 없어 // 길은 끝이 있지만 / 마음은 끝이 없어 // 내가 기다리고 있는 엄마는 / 언젠가 꼭! 영원히 / 만날 수 있어”
  
슬픔이 밤마다 눈물뿐 아니라 문장으로도 마음껏 표현되었기 때문일까. 시우의 시 <영원과 하루>는 이제 자신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로 인해 슬픔에 빠진 뭇사람들을 위로하는 힘까지 가지게 된 듯하다. 영화에서보다 훌쩍 키가 자란 상태로 시사회 무대에 서서 질문을 받는 시우는 분명 더 이상 아빠의 위로가 필요한 꼬맹이 울보가 아니라 늠름한 위로자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내가 일하는 우리 병원 진단검사의학과는 본관 건물 3층 한가운데에서 수술장과 입구를 마주하고 있다. 복도를 다니다 보면 매일 카트에 누워 수술장으로 향하는 많은 환자를 만난다. 이때 보호자들이 바로 수술장 문 앞까지 동행하는 경우가 흔하다. 대개 가까운 가족 관계인 동행인들은 수술장 앞에서, 그러니까 진단검사의학과 앞에서 눈물의 작별 인사를 나눈다. 간혹 수술장으로 들어가는 어린 자녀의 손을 차마 끝까지 못 놓고 계속 우는 어머니도 있다. 이런 어머니는 수술장 입구 바로 옆 보호자 대기실에서 수술이 끝날 때까지 몇 시간이고 서서 기도하다 울다 하신다.
  
슬픔에 빠지고 불안에 떠는 분들을 가까이에서 자주 보다 보니 뭔가 짧게 위로의 말이라도 한마디 건네고 싶은데 그게 마음처럼 잘 안 된다. 그러던 차에 최근 서점에서 집어 든 신간 도서가 <이해인의 햇빛 일기>다. ‘작은 위로가 필요한 아픈 이들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슬픈 사람들에겐 / 너무 큰 소리로 말하지 말아요 / 마음의 말을 은은한 빛깔로 만들어 / 눈으로 전하고 / 가끔은 손잡아주고 / 들키지 않게 꾸준히 기도해주어요(후략)”
  
<슬픈 사람들에겐>이란 시를 통해 위로에도 인내와 겸손이 필요하다는 걸 배워야 한다는 이해인 수녀님의 조언을 새기다가, 대장암 투병 후의 본인 경험이 분명한 <퇴원 후에>란 시에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구절을 발견했다. 
  
“숨을 쉬는 것 / 걸어 다니는 것 / 밥을 먹는 것 // 극히 평범하게 했던 일들을 / 내가 다시 할 수 있다는 것이 / 가장 큰 기적의 선물로 / 놀라움으로 다가오네요(후략)”
  
민시우군이 <기적>이란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쓴 시가 데자뷰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숨 쉬는 것, 뛰는 것, 걷는 것, / 안아주는 것, 먹는 것 // 게임하는 것, 운전하는 것 / 잠자는 것, 씻는 것 // 이런 게 모두 다 기적이야”
  
나이가 들어 큰 병을 앓고 난 뒤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를 새삼 깨닫는 노수녀님은 그 평범한 일상을 ‘기적’이라 부른다. ‘사랑하는 가족의 빈자리’라는 애끊는 슬픔을 경험한 초등학생 역시, 별 특별할 것도 없이 반복되는 하루하루의 일들이 모두 감사의 조건이요 기적임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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