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20:55 (금)
의사에게 책임 떠넘기기
의사에게 책임 떠넘기기
  • 전성훈 변호사(의협 법제이사)
  • 승인 2023.11.07 10: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67)

성경 창세기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데려다가 온갖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가 열린 에덴 동산을 돌보게 하며 이렇게 당부했다. “이 동산에 있는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악과만은 따먹지 마라.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아담은 이 유일한 금령을 어겼다. 하나님은 아담을 찾아와 그에게 추궁해 물었다. 그러자 아담은 하나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어서 내가 먹었나이다.”  이 말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에게 거짓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전지전능하여 당연히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었을 하나님이 굳이 아담을 찾아와서 그에게 물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하나님은 아담에게 단순히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 있는’ 답변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책임을 떠넘김으로써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리고 분노한 하나님은 아담을 낙원에서 추방함으로써 영생을 빼앗아 버렸다.
 
이 유명한 태초의 신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책임 떠넘기기’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 왔다. 고대에는 날씨가 좋지 않아 흉년이 들면 왕에게 책임을 물어 왕을 죽이거나 교체했다. 14세기 유럽에서 흑사병이 대유행하자 원인을 알지 못한 대중들은 이를 유대인들의 행위로 돌려 이들을 집단폭행하거나 학살하기도 했다. 1923년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으로 10만 명 이상이 사망하자 일본인 군경과 자경단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면서 무고한 조선인 수천 명을 학살했다.
 
또 다른 전형적 사례로 중세의 마녀사냥을 들 수 있다. 15세기 유럽 교회들은 심각한 세속화와 부패로 큰 위기에 놓여 있었다. 지식인들은 종교개혁을 요구했고, 교회는 이를 회피하기 위해 책임을 떠넘길 대상이 필요했다. 이에 로마 교황은 1484년 ‘긴급 요청’이라는 회칙을 발표해 ‘마녀는 실재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러한 교황의 책임 떠넘기기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 간 남편이라는 보호자가 없는 50만 명에 달하는 무고한 과부와 미혼 여성들이 마녀로 지목되어 불태워졌다.
 
최근 법원은 독감 치료 주사를 맞은 다음날 환각 상태에서 아파트 7층에서 뛰어내려 하반신이 마비된 중학생이 병원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약 5억 7천만 원(지연이자 포함 약 7억 2천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 학생은 2018년 12월 독감 증세로 병원에 내원했고, 검사 결과 A형 독감으로 진단되자 의료진은 페라미플루를 주사했다. 당시 의료진은 페라미플루 주사제의 부작용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는데, 그 의약품설명서에는 ‘이상반응’ 중 하나로 ‘정신, 신경증상(의식장애, 이상 행동, 섬망, 환각, 망상 등)’이, ‘일반적 주의사항’으로 ‘유사약물의 경우 인과관계가 불명확하지만 투약 후에 이상행동 등의 정신신경증세를 발생한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자택에서 요양할 경우 적어도 2일 간은 소아청소년이 혼자가 되지 않도록 환자, 가족에게 설명할 것’이라는 내용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
 
법원은 페라미플루 투여 자체는 적절한 치료행위였고, 페라미플루 부작용으로 인해 이상행동 등이 발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의료진으로서는 이러한 사고를 예견하기 쉽지 않았음을 들어 피고 병원에게 40%의 책임만을 인정했다. 즉 발생한 손해 14억여 원의 60%인 약 8억 5천만 원은 환자가 스스로 부담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첫째 법리적 측면에서, 법원의 인과관계 인정이 적절했는지 의문이다. 앞서 본 주의사항 기재의 계기가 된 일본의 타미플루 투약 후 추락 사례의 보고 이후에도 여전히 의학적 인과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페라미플루 의약품설명서에도 ‘인과관계가 불명확하지만... 이상행동 사례가 보고됨’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처럼 의약품과 환각 증상의 인과관계 자체가 불명확함에도, 법원은 이를 전제로 더 나아가 이를 설명하지 않은 설명의무 위반과 악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고 거액의 손해배상을 명한 것이다.
 
둘째 실무적 측면에서, 우리 의료 현실을 고려할 때 법원이 과연 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이 판결의 취지는 ‘의약품설명서에 기재되어 있다면 의료인은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약회사는 의약품설명서에 ‘인과관계가 불명확하더라도’ 부작용, 주의사항, 경고 등을 상세히 기재하면 그만이고 그럴수록 책임을 줄일 수 있는 반면, 의료인은 의약품설명서 기재 내용에 전혀 관여할 수 없음에도 책임만 더 지게 된다. 이처럼 모든 책임을 의료인에게 떠넘기는 것이 우리 의료 현실에서 감당 가능한지 의문이고, 더욱이 ‘자신의 결정만큼 책임을 진다’는 자기책임원칙에 부합하는지도 의문이다.
 
셋째 제도적 측면에서, 이 사건과 같이 의약품 부작용으로 발생한 손해를 의료진과 환자에게만 떠넘기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의약품제조업자 등으로부터 징수한 부담금을 재원으로 2014년부터 ‘의약품 부작용 피해구제사업’이 시행되고 있기는 하나, ‘의료사고’는 피해구제급여 지급대상에서 아예 제외되어 있다. 따라서 의약품 처방과 관련하여 단 1%라도 의료진의 과실이 인정되는 경우, 손해 100%가 오롯이 의료진에게 떠넘겨진다. 게다가 의료진이 예견하기 힘든 경우라면(대부분의 의약품 사고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사건과 같이 책임제한 법리 등에 의해 그 손해의 상당 부분은 다시 환자에게 떠넘겨진다. 결국 의약품의 판매 이익은 제약회사가 얻으면서, 일정 확률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손해는 의료진과 환자가 분담하게 된다.
 
법원은 법을 해석하여 적용할 뿐이므로 제도적 문제점을 짚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피해자 구제에 치우친 나머지 의료인에게 큰 부담을 지웠고, 나아가 제도적 문제점을 더욱 드러나게 만들었다. 제도적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특히 의료진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이런 해결 방식은 그 자체로 부당하다. 그리고 이런 ‘책임 떠넘기기’의 1차적 피해자는 의료인이지만, 최종적 피해자는 국민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