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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맨
피아노 맨
  • 홍영준(원자력병원 진단검사의학과)
  • 승인 2023.10.24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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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92)

우크라이나 사태에 이어 터진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분쟁으로 요즘 정신이 하나도 없을 미국 국무부 장관 토니 블링컨이 지난 9월 말 조금 특이한 이슈로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미 국무부가 음악을 통해 세계 평화에 기여하겠다는 취지로 출범시킨 ‘글로벌 음악 외교 이니셔티브’ 행사장에서였다. 많은 외교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푸른 넥타이에 짙은 감색 정장을 하고 점잖게 분위기를 이끌던 블링컨이 갑자기 기타를 둘러메고 직접 연주를 곁들이며 멋진 블루스 음악 한 곡을 불렀다. 그 영상이 SNS에 올랐고 삽시간에 수백만의 조회 수를 기록하며 댓글에는 찬사가 이어졌다.
  
나 역시 그 영상을 여러 차례 다시 돌려보았다. 한 나라의 외교 수장이 웬만한 프로 뮤지션 뺨치는 솜씨로 무대에서 ‘록 스피릿’을 뽐내는 장면이라니! 유쾌한 충격이었고 부러움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날 그가 부른 노래는 블루스 음악의 대가 ‘머디 워터스’의 ‘후치쿠치 맨(Hoochie Coochie Man)’이었다. 나는 그 원곡 악보를 찾아 제목이며 가사가 무슨 뜻인지 나름대로 열심히 해석해보았다.
  
‘후치쿠치’는 배꼽을 드러낸 채로 도발적인 안무가 많이 들어간 옛날 춤을 의미한다. 여기에 ‘맨’이 붙었으니 뭔가 ‘에로틱한 걸 좋아하고 여자를 밝히는 남자’라는 성적(性的)인 의미가 들었을 것 같다. 하지만 노랫말 전반을 훑어보면, 후치쿠치 맨은 ‘7월 7일 7시에 일곱 명의 의사가 그 출생을 도운 행운의 사내’로서 ‘매우 신비로운 능력자’를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검은 고양이 뼈를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고 ‘마력(mojo)’을 소유하고 있다. 작곡자는 한 인터뷰에서 후치쿠치 맨을 마치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탄생을 예언한 ‘동방박사’에 비유한 적도 있다. 예전에 브로치 하나에도 외교적 의미를 부여했던 여성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를 생각한다면, 외교관들이 즐비한 자리에서 블링컨이 굳이 이 노래를 부른 건 어쩌면 마초처럼 강하고 주술사처럼 신출귀몰한 초강대국 미국을 각인시키려는 의도 아니었을까. 
  
팝송 가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다. 팝송으로 영어 공부하기가 유행이던 시절 우리 집에는 팝송 책들이나 카세트테이프가 늘 수북했고 곽영일이나 오성식씨가 진행하던 라디오 방송은 한때 나의 단골 주파수였다. 물론 영어 실력 향상에 팝송 공부가 크게 효과적인 수단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우리나라 유행가가 그렇듯이 팝송 가사도 한참을 곱씹으면서 따라부르다 보면 인생의 희노애락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그러다 부지불식간에 나이에 비해 성숙해지는 듯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영어 공부와 인생 공부 두 가지를 함께 하게 한 팝송 단 한 곡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빌리 조엘의 <피아노 맨>을 이야기할 것이다. 1973년에 발표된 이 곡을 나는 수백 번 들었고 1985년에 촬영했다는 뮤직비디오도 백번은 넘게 보았다. 하모니카와 피아노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는 그 두 가지 악기 똑같이 따라하기를 내 생애 마지막 숙제로 삼고 있을 정도다. 단순한 멜로디가 반복되는 곡이라 불가능할 것 같진 않다. 연주도 매혹적이지만 사실 이 노래의 백미는 등장인물들을 세세히 묘사한 그 가사라고 할 수 있다.
  
<피아노 맨>의 가사는 잘 알려진 대로 빌리 조엘의 실제 경험에 근거해 쓰였다. 뉴욕에서 발간한 첫 번째 앨범의 실패로 음반사와 갈등을 겪은 그는 도망치다시피 LA로 떠난다. 신분을 감추고 가명으로 코리아타운 근처의 한 바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생계를 잇던 시절 만난 인물들이 가사에 고스란히 등장한다.
  
진토닉에 취해 빌리 조엘에게 옛 노래 한 곡 연주해달라 청하는 노인. 젊었을 때는 확실히 외우던 가사가 지금은 단지 슬프고 달콤했던 기억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말이 듣는 이를 우울하게 한다. 바텐더로 일하는 존은 농담도 잘하고 눈치도 빠르지만 그의 마음속 한 곳에는 하루라도 빨리 바를 떠나 영화배우가 되고 싶은 꿈이 있다. 해군 병사 데이비와 이야기를 나누는 폴은 부동산 중개업자인 동시에 소설가다. 바빠서 결혼도 못했다는 사람이 과연 소설은 썼을까. 뮤직비디오에서 영화배우 토미 리 존스가 선글라스를 쓰고 살짝 사기꾼 분위기로 나오는 걸 보면 ‘소설가’는 그저 허세가 깃든 희망사항이었을 것만 같다.
  
그밖에 그럴듯한 말로 손님들에게 술을 권하며 ‘정치를 연습하는’ 웨이트리스들, 점점 취해가는 비즈니스맨들, 제법 많은 고객이 몰려와 기분이 흐뭇한 매니저 등등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하여 소위 ‘떼창’을 이어 가지만 단연 주인공은 우리의 ‘피아노 맨’이다. 그의 노래와 연주를 잘 들었다며 팁을 던져주던 한 손님이 피아노 맨에게 이런 말을 한다. “그런데 당신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요? (Man, what are you doing here?)”
  
‘당신같이 훌륭한 뮤지션이 이런 바에서만 노래하긴 아깝다’는 뜻으로 건넨 일종이 칭찬이었겠지만 빌리 조엘에게는 마치 죽비로 정수리를 한 차례 맞은 것 같은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곧 LA 생활을 정리한 다음 다시 원래의 가수 자리로 돌아가 2집 <피아노 맨>을 발간했고 마침내 큰 성공을 거둔다.
  
2019년에 나온 영국 영화 <예스터데이>는 어느 날 전 세계에서 일어난 대규모 정전 뒤에 비틀즈가 사라진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비틀즈와 그들의 노래를 인류가 모두 잊어버렸을 때 오직 이를 기억하는 주인공 한 사람이 비틀즈 노래를 불러 졸지에 세계적인 가수가 된다는 코메디 영화다. 나는 이 비슷한 일이 진짜 일어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빌리 조엘과 그의 노래를 갑자기 잊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상상한 적이 있다. 딱 한 사람 나만 빼놓고 말이다.
  
아직 하모니카와 피아노 연주는 서툴지만 멜로디와 가사는 그런대로 다 외우고 있으니 적어도 <피아노 맨>은 제대로 재현해 낼 것이다.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실의에 빠져 담배 연기 자욱한 바에서 술에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슬프고도 달콤한 이 노래를 들려주며 “Man, what are you doing here?”하고 토니 블링컨처럼 좀 폼나게 외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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