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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문인회 수필릴레이 9] 명나라 영락제의 찬탈과 환관 정화의 해외 원정 진출 이야기
[의학문인회 수필릴레이 9] 명나라 영락제의 찬탈과 환관 정화의 해외 원정 진출 이야기
  • 의사신문
  • 승인 2023.10.11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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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규 원장(의학문인회장·성내과의원)

근래 조선 초 왕자의 난으로 왕권을 찬탈한 태종 이방원이나 조카 제거하고 반란으로 집권한 세조 이야기 등의 극적인 사건들은 흔히 안방 드라마나 영화 소설의 주제가 됩니다.

중국에서도 같은 시기에 과정도 유사하게 조카 황제에 대해 피비린내 나는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영락제가 있습니다.

중국 신생 국가 명나라에서도 건국한 주원장(朱元璋)은 원나라 말기 극도로 피폐하던 시절에 태어나 기근과 전염병에 부모 형제 잃고 거지로 전락해 돌아다니다가 홍건적 무리에 가담하여 결국 황제로까지 된 이야기는 부귀와 권력 속성에서는 인간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그는 초대 황제 홍무제(洪武帝)가 되었으나 집권 후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고락을 같이 한 대부분의 공신들을 대부분 숙청하였는데 역사적으로도 가장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였으며 그 수가 9~10만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의 일생은 근래에 중국에서 46부작의 드라마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어 한국에서도 방영되었습니다.

그는 통치 후반에 후계자 문제에 이르러서, 후계자 선정에서 건국 과정부터 공이 많았고 혈기 왕성한 4째 아들 주체로 하려다가, 대신들 반대에 부딪혀 죽은 맏아들인 황태자의 아들 즉 손자를 후계자로 지명하게 되었으며 홍무제가 1398년 죽자 그 손자 주윤문이 건문제로 등극하였습니다. 

그러나 숙부인 홍무제 아들 주체가 반란 일으켜 조카 건문제의 황위를 찬탈하여 많은 신하들을 몰살하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이후 건국 공신이자 명망이 높은 방효유에게 자신 치적 쓰라고 시키자 그는 반발하고 비판의 글까지 쓰니 이에 노하여 구족 더하여 제자 친구 지인까지 847명이나 십족을 멸하여 죽였으니 때로는 인간이 동물보다 더 잔인할 수 있다는 예를 보여줍니다.

또한 이를 가리켜 '영락 연간의 오이 넝쿨 당기기'라는 유행어의 어원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당시 주위에서 명신 방효유 등을 처형하면 국가에 충신이 사라질 것이라고 하였으나 그는 '나의 패륜은 세월이 흐르면 비바람에 잊혀질 수 있겠으나 나의 위업은 역사에 오래 기록될 것'이라 했습니다. 

보면 이는 근래 TV 드라마로 방영된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 특히 세조가 조카 단종 몰아내고 왕이 된 정변과 거의 판박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선 태종이나 세조 등도 그러하나 이런 사람들은 정치력, 리더십도 있고 자기 죄 때문이라 발이 저려 그런지 부강하게 만드는 통치에 노력하여 국가를 번창하게 하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그래서 영락제는 멀리 신하 정화를 선단으로 동남아, 인도, 아랍까지 보내 중국의 위세를 떨치고 화교가 동남아 등 진출 정착하는 데 큰 기여를 합니다. 

어디나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인가요? 이에 따른 투쟁과 싸움은 흔히 반복됩니다.

고금에 인간 본성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었으며 일부 주장을 보면 근대 서양에서 영국의 홉스 경우 주장은 자연 상태에서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이 끝이 없으므로 자신의 이익을 한없이 추구하여 사회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되므로 개인의 권리를 국가에 양도하는 사회계약론을 주장하였습니다.

한편 유가의 맹자 등이 말한 인간 본연의 성품은 우주 자연의 이치 즉 천리가 내재된 인간의 선한 본성으로 주장한 성선설 같이 루소도 천성이 선한 것으로 믿으며 자연 상태에서는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였으나 자유 의지로 권리를 국가에 이양하였다는 설을 주장하였습니다.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현대 심리학에서는 그래도 인간은 대다수가 협동하고 어려움에 처한 주위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도와준다는 행동을 보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현대사회가 개인주의와 물질주의로 메말라지고 있으나 그래도 다수는 선하다는 희망과 관념이 성립합니다.

수년 전에 말레이지아를 방문하였는데 말레이반도의 동말레이지아, 보르네오 북부의 서말레이지아로 구성되어 있고 종족 구성이 대략 말레이인 58%, 중국인 25%, 인도파키스탄인 7%였습니다.

중국인 비율이 높은 것은 과거 중국인들의 해외 진출이 일찍 이루어져 이후 화교들이 말레이지아 외에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남아 각국에서 상권 장악과 본토와의 무역 등 교류에 지대하게 기여를 하였고 중국이 굴욕을 딛고 일어서서 과거 강대국의 영광과 위세를 회복하려는 ‘대국 굴기’와 ‘중국몽’ 달성 노력에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말레이지아는 과거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주로 생산되어 비싸서 ‘검은 금’으로까지 불리며 과거 유럽에서 인기가 높아 수요가 폭발했던 육두구 후추 등 향신료를 비롯한 물자 거래와 수송의 해상무역 요충지이었습니다.

향신료는 인도 동남아 진출 뿐만 아니라 인도와 무역하기 위해 서구열강이 당시 오스만 터키가 강성하여 동서교통로 차단한 것을 피해 다른 길 찾다가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 대륙 발견하고 식민지로 만든 동력도 되었습니다.

말레이지아 여행시 둘러본 말라카(Malacca 또는 Melaka 멜라카)는 말레이반도 중남부에 있는 유서 깊은 도시로 동서 교역 교차로에서 위치하여 말라카 해협 중계 국제도시로 발달했던 곳이며 과거 인도네시아 향신료 무역기지로 해상무역 주요 통로로 동서문화 교차로에서 위치하여 숙명적으로 외세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각국이 침략 점령하는 영토 전쟁이 끊이지 않아 그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말라카 식민지 시대 건물 유적

근대에 와서는 나중에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일본까지 멀리서 온 외세 침략이 지속되어 현재는 중국풍 뿐만 아니라 긴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시대의 유적 모습이 많이 남아 이국적이고도 아름다운 말라카를 보면 마카오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역할이 싱가포르에게 그 영광을 빼앗겨 과거의 영화로 남아 이제는 세계문화유산 지정된 관광도시로 남아 있으니 모든 것은 그대로 머물지 못하고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진리가 피부에 다가옵니다.

말라카 거리의 아름다운 풍경


말레이지아 등에 화교들이 이주한 역사를 보면 명나라 전성기의 영락제 치세에 당시 신임하는 환관 정화(鄭和 1371~1434)를 대장으로 함대를 7차례 걸쳐 한 원정이 큰 기여를 합니다.

길이 말레이지아 등을 거쳐 인도,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북서부, 현재 케냐의 말린디까지도 갔으니 서양 대항해 시대에 70년 앞서며 그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함대 규모가 거대하여 1405년 1차 원정을 떠날 때 큰 배는 137m 폭 56m나 되었고 8천톤 정도 규모이고 함선 62척에 승무원 인원이 2만78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하고 영락제 손자인 선덕제 7차 원정까지 하였으나 이후 정화가 죽고 또 쇄국 정책으로도 돌아서서 결국 긴 대원정은 중단되었습니다.

항해 중단은 외국 도움 없이 중국 자체로만으로 잘 살 수 있다는 생각과 높은 비용 문제 등이 원인이기도 하나 쇄국 정책 이후 중국은 산업혁명 후의 서구 제국주의 열강 세력에 힘없이 당하여 잠자는 돼지라고까지 비웃음을 받았으니 냉정한 국제사회에서 국가는 항상 국제 정세나 외세에 눈뜨고 우물안 개구리가 되어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원정대 지휘한 정화의 조상은 몽골 시대에 귀화한 색목인 무슬림으로 운남성 개발한 관리였으며 정화도 본명이 마삼보(馬三寶)로 성 ‘마(馬)’씨는 이는 당시 중국 무슬림들이 무함마드의 이름 따서 그 후손으로 자처한 마씨를 자주 사용한 관례를 따른 것이라고 하며 선단 지휘자를 그로 선택한 것도 항해시 아랍 등 무슬림 지역 항해를 고려한 것입니다.

그는 이후 명나라 주원장은 원나라를 멸망시킬 때 사천성 정복 후 원의 잔존 세력하에 남아 있던 운남성을 공격하였으며 그 지역의 쿠빌라이 손자 양왕에게 항복을 권하였으나 사자도 죽이고 끝까지 저항하였습니다.

그 때 화가 난 주원장이 대군 동원하여 승리 후 양왕은 자살하였고 성인 남자는 죽이고 미성년 남자는 거세하여 귀족들에게 분배되었으며 이 때 정화 역시 연왕 주체(후에 영락제)에게로 가 환관이 되었고 양왕 밑에 있던 아버지는 전사하였습니다.

이후 사실 전투의 장군 역할도 하였고 이후에 주체가 거사한 정난의 변에서 도와 공을 세워 정씨 성을 하사받고 환관 대표인 태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복보다 중국의 위세를 떨치는 조공무역이 목적이었고 당시 부족 국가 수준의 말라카를 군사력으로 지켜주기도 하여, 중국인을 보내 정착시켜서 생긴 독특한 페라나칸 문화도 그때의 말레이인과 중국계 혼혈인 바바뇨냐 페라나칸들 문화공동체로 형성되었습니다.

수 년 전 여행에 아래 나오는 당시 정화 함대가 지은 절인 쳉훈텐(청련정)을 방문하였습니다.

전통 신앙과 불교 도교 유교 혼합된 모습을 보이며 재료를 건축할 때 타고 온 배의 목재 등을 이용하였다고 하며 중국식의 도자기로 만든 지붕과 아름다운 장식이 눈길을 끕니다.

말라카에 아직 남아 있는 정화 함대가 가져온 배에서 뜯은 목재로 말라카에서 지은 절인 쳉훈텐(청련정) 입구와 내부

과거를 돌아보면 역사는 반복되어 비슷하게 재현되는 수가 많습니다.

보면 특히 그 전의 잘못에서 그 교훈을 배우지 못하면 흔히 같은 과오를 범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과거 고구려는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 전성기의 당 태종 대군 침공까지 격퇴한 강인한 나라였으며 철권정치 하던 연개소문은 평양까지 쳐들어온 당군도 결국 물리쳤고 유언으로 “너희는 절대로 벼슬을 탐내어 서로 다투지 마라. 서로 반목하여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된다”라고 아들 셋에게 당부하였습니다.

사후 장자 남생이 대막리지에 올랐으나 곧 권력투쟁이 시작되었고 소인배 인간질 넘어간 남건은 형 남생이 지방을 순시하는 새 남생의 아들을 죽이고 대막리지가 되었으며 노한 남생은 이성을 잃고 당에 항복해서 당은 손쉽게 침공하여 남생은 앞잡이 노릇하여 결국 그 강성하던 고구려도 힘없이 망하였으니 내부 분열이 얼마나 무서운가 보여줍니다.

특히 우리가 조선시대에 겪은 왜란 참사 후 전쟁 중 선조를 모시고 다녔던 서애 유성룡 선생은 뼈아픈 굴욕과 고난을 징비록으로 세세히 기록하여 후세에 답습하지 말도록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뒤이은 양 호란의 침략 전쟁, 그 후 국제 정세를 모르고 있다가 우물안 개구리 격으로 당한 구한말 일본 등 침탈이 마찬가지로 일어났고 외세에 크게 당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국리민복(國利民福)과 부국강병(富國强兵)에서 국가의 융성함이 오고 내우외환에서, 망국의 재앙이 시작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이에 우리는 내부 갈등으로 정력을 소모하지 말고 냉정한 국가 이기주의 국제 사회에서 바깥과 자주 소통하며 뼈를 깎는 노력으로 지난 역사를 반면교사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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