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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교수의 선물
윤 교수의 선물
  • 홍영준(원자력병원 진단검사의학과)
  • 승인 2023.10.11 09: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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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91)

아주 오래 전 내가 진단검사의학과 레지던트 1년차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한 연차에 세 명씩이던 우리 의국의 전공의들은 3년차 ‘강씨(姜氏)’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성(姓)이 달랐다. 우리 1년차는 ‘홍(洪)’, ‘윤(尹)’, ‘박(朴)’이었다. 아래위 연차가 워낙 허물없이 친했기에 몇 살 나이 차이가 있어도 일상대화에서는 서로 성만으로 호칭하는 경우가 흔했다. “이번 주 저널 클럽 발표자가 홍인가, 윤인가?”, “이 면역 검사 보고서는 양(梁)에게 물어보고 내도록 하자”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수련 과정의 첫 스케쥴로 임상미생물 파트에서 세균집락 판독을 하던 ‘박’이 사고를 쳤다. 세균과 벗하며 평생을 살아갈 게 갑갑했던지 느닷없이 사직서를 낸 것이다. 이후의 의국 생활은 어쩔 수 없이 홍, 윤 둘이서 박의 공백을 메우며 3인 몫을 해내느라 매우 힘들었다. 군대를 먼저 다녀와 후배인 나와 동기로 레지던트를 하게 된 윤은 ‘정리정돈의 화신’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책상과 책장의 완벽한 정리는 기본이고, 언젠가는 컴퓨터 키보드의 때를 닦아내느라 하루를 꼬박 다 보낸 적도 있다. 뭐든 잘 어질러놓는 내가 분명 마음에 들지 않았을 텐데 동고동락하다 보니 그런 단점쯤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의국에서 같이 먹고 자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매사에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커져만 갔다.
 
내가 군의관 근무를 시작했을 때, 윤은 드디어 ‘윤 교수’가 되었다. 휴가를 나올 때면 윤 교수 방을 자주 찾았고 그에게서 종합병원 전문의에게 필요한 많은 팁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그의 취미생활이었다. 레지던트 때부터 컴퓨터 조립과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 짜기에 몰두했었고 사진찍기를 좋아해서 신품 디지털 카메라를 수시로 사 모으던 전력은 알고 있었는데 이번엔 연구실 한쪽 책장을 온갖 클래식 CD가 가득 메우고 있었다. 우리의 윤 교수님이 이번엔 우아하게 클래식 ‘오타쿠’로 변신한 것이었다.
 
원자력병원에 출근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나는 가끔 윤 교수를 만났다. 예상대로 매번 그는 의사일 외에 항상 자기가 즐거워하는 뭔가에 푹 빠져있었다. 한동안은 자전거를 미친 듯이 타더니 언젠가부터는 우리가 통상 오토바이라 부르는 ‘바이크’에 빠져서 전국 방방곡곡의 국도를 폭주족처럼(물론 본인은 항상 안전 규정은 잘 지켰다고 한다) 누비고 다녔다. 윤 교수의 ‘이중생활’이 신기했지만, 그 열정이 내게 큰 자극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얼마 전 대한임상검사정도관리협회의 추계 학술대회에서 윤 교수가 특강을 한다고 하길래 열 일을 제쳐놓고 들으러 갔다. 점심 무렵 시작하는 그 강의 시간에는 통상 사회 명사들을 초청해, 학술 주제가 아니라 인문학 이야기 같은 내용을 준비했었기에 이번에 우리 윤 교수를 강사로 섭외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려니 했다. 기대대로 특강의 제목은 ‘걷기를 통한 삶의 질 향상’이었다. 이분이 어느새 자전거와 바이크를 졸업하고, 이제는 올레길의 창시자 서명숙처럼 ‘걷기’ 전도사가 된 것이다.
 
윤 교수는 백 장이 넘는 슬라이드를 통해 자신이 다녔던 산들과 섬들, 사찰들, 그리고 둘레길들을 보여주었다. 설악산 공룡능선에서 만났다는 한국의 에델바이스, ‘설악솜다리’ 사진을 보여줄 때는 당시 윤 교수가 느꼈을 기쁨과 감격이 고스란히 청중에게 전달되는 듯했다. 마치 ‘이런 게 바로 사람답게 사는 것 아니냐’고 되묻는 듯한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는 행복한 감정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카르페 디엠’ 혹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와 같은 현자들의 조언을 구체적으로 우리 삶에 적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의 저자 웨인 다이어 박사는 여기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살아보세요. 이 세 가지 중 하나만 실천해도 지금껏 귀 기울이지 못한 아름다운 소리들이 당신의 내면에 도착해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책은 자주 읽고 어쩌다 글을 쓰기도 하지만, 산책 혹은 걷기와는 담을 쌓고 살던 내게 웨인 다이어 박사의 말은 인생의 중요한 숙제 중 하나를 못 한 것처럼 찜찜한 느낌이 들게 했다. 그러던 차에 행복한 걷기에 대하여 윤 교수의 생생한 ‘간증’을 들으니 당장에라도 자연 속 어딘가를 걷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학회 초록집에 윤 교수가 온갖 자료를 참조해 정성껏 정리해 놓은 ‘우리나라의 걷는 길’ 종합 테이블을 뒤졌고 그중 하나인 ‘안산 자락길’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가 내겐 아주 익숙한 동네였기 때문이다.
 
추석 연휴 어느 아침 아들과 함께 안산 자락길을 걷기 위해 서대문 자연사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박물관 입구에 서 있는 엉성한 티라노 사우르스 모형을 보고 아들은 어린 시절 자기가 이곳에 몇 번 왔었음을 기억해냈다. 거기서 시작해서 7km가량인 안산 자락길을 한 바퀴 돌았다.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코스였지만 난 그 길에서 보물찾기하듯, 아들의 티라노보다 훨씬 많은 걸 찾아낼 수 있었다.
 
말 안장을 닮았다 하여 ‘안산(鞍山)’이라 이름 붙은 이곳은 어린 시절 신촌에 살면서 방학 때마다 외할아버지와 등산하던 산이다. 중턱에 있는 약수터 옆 바위에서 외할아버지는 늘 ‘청산리 벽계수’ 시조를 읊으시곤 했다. 그때의 그 바위 비슷하게 생긴 돌 옆으로 ‘봉원사’를 향하는 푯말도 보인다. 중학교 때 친했던 친구가 오래전에 스님이 되어 시무하는 태고종의 총본산. 시간 될 때 절밥 먹으러 놀러 오라던 녀석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난 그렇게 안산 자락길을 걸으면서 곳곳에 널려 있는 옛 추억들을 많이 주웠다. 또 길가에 예쁘게 피어있는 수선화 닮은 빨간 꽃의 이름이 ‘꽃무릇’이란 걸 확인하고 아들과 함께 이 꽃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걷기 혹은 산책이, 잊고 있던 사랑과 우정을 생각나게 해주었고 아들과의 대화를 풍요롭게 해주었다.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로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을 주던 ‘오타쿠’ 윤 교수는 이제 남들의 삶을 덩달아 풍성하게 해주는 선물도 주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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