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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포인트 레슨
원포인트 레슨
  • 홍영준(원자력병원 진단검사의학과)
  • 승인 2023.09.2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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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90)

병원에 탁구 모임을 정식 동아리로 등록한 때가 2012년이니 벌써 10년도 더 지났다. 나는 초대 회장이자 현 회장을 맡고 있다. 비록 푸틴과 시진핑의 길을 따르고 있지만 그래도 늘 회원들의 실력 향상을 위해 고심한다. 그 일환으로 외부에서 코치를 초빙하여 일주일에 두어 번씩 회원들이 꾸준히 레슨을 받도록 했다. 코치들은 이런저런 개인 사정으로 오래 레슨을 지속하지 못했기에 지금 오는 선생님이 벌써 일곱 번째다.
  
남자 코치, 여자 코치, 선수 출신, 사회 체육인 출신, 공격 전형, 수비 전형 등등 코치 선생님들은 다양한 특징이 있었고 저마다 가르치는 방법도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선생님이 자기와 맞지 않는다며 레슨을 중단하는 회원이 생기기도 했다. 나는 넉넉한 수강료도 아닌데 병원까지 찾아주는 그분들이 고마워서 모든 코치로부터 빠짐없이 레슨을 받았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코치들로부터 온갖 비법을 물려받아 전천후 플레이어가 되는 날을 꿈꾸면서.
  
놀라운 일은 나름 성실하게 레슨을 받았음에도 내 실력이 하나도 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날렵한 풋워크가 중요하다면서 탁구대 좌우로 미친 듯 볼 박스의 공을 날려 보내는 선생님에게 레슨 받을 때는 체력 고갈로 매번 헉헉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을 지경이었다. 지시대로 열심히 뛰다 보면 괄목상대할 만한 성장이 있으리란 믿음으로 인내하며 땀을 흘렸었는데… 허무한 일이었다.
 
체력이 안 될 때는 무기를 바꿔보라는 또 다른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엄청나게 비싼 편백나무 통판에 평면 러버 대신 오톨도톨한 ‘핌플아웃(pimple-out)’ 러버를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를 괴롭힐 실력을 채 갖추기 전에 내 라켓에 내가 적응을 못 해서 애를 먹었다. 물론 선생님은 계속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 날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며 격려해주었다. 슬프게도 그런 날은 오지 않았고 무릎과 어깨의 관절통만 심해졌다.
  
‘아, 이제 실력 키우기는 포기하고 친목 위주의 명랑탁구로 가야 하는가’ 탄식하면서 마음을 애써 추스를 즈음 지금의 코치가 나타났다. 호리호리한 체형의 젊은 여선생님이라 처음엔 별 기대를 안 했는데 몇 차례 내 플레이 스타일을 유심히 보더니 한 가지만 집중적으로 강조했다. 백스윙할 때 허리를 확실히 돌리라는 것. 선생님은 레슨 중에 계속 “허리, 허리, 허리”하며 노래를 불렀다. 귀가 따갑게 지적받은 대로 허리 회전 딱 하나만 신경 썼더니 곧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탁구대에 바싹 붙어서 경기하는 ‘전진속공’ 스타일인 내가 그간 공격은 제대로 못하고 수비에만 급급했던 이유가 공간을 만들지 못해서였음을 깨달았다. 재빠른 허리 회전을 통해 그 약점을 극복해가니 공격이 쉬워졌다. ‘유레카’ 소리가 절로 나왔다.
  
원래 탁구보다 원포인트 레슨이 성행하는 운동은 골프다. 얼마 전 타이거 우즈는 뉴저지에서 자기가 설립한 재단 주최로 일반인들을 위한 골프 레슨 행사를 개최했다. 이때 참석자 한 사람이 우즈에게 아마추어 골퍼가 가장 명심해야 할 팁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즉각 “그놈의 유튜브를 그만 봐야 한다(Don’t watch f***ing YouTube.)”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모름지기 원포인트 레슨이라면 레슨 받는 당사자에게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조언을 ‘맞춤형’으로 해주는 것이 핵심일 텐데, 맞지도 않고 소화도 못 할 팁을 한 보따리 산만하게 안겨주는 일방적인 유튜브 레슨의 해악을 꼬집은 것이다. 체력이 안 되고 점점 순발력도 떨어지는 내게 풋워크가 중요하다고 뺑뺑이를 돌리던 탁구 선생님 얼굴이 떠오른다.
  
물론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범용’ 원포인트 레슨도 있다. 삼성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은 워낙 골프를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사실인지 지어낸 건지 모르는 골프 관련 에피소드들이 여럿 전해 내려온다. 그 가운데 이 회장과 전설적인 프로골퍼 아놀드 파머가 동반 라운딩을 했던 이야기다. 1970년대 중반 당시 골프 황제로 불리던 아놀드 파머를 이 회장이 초청해서 안양 컨트리클럽에서 함께 골프를 쳤다. 초청비로 거금을 들였던 이 회장은 파머로부터 비법을 배우기 원했다. 그런데 파머는 묵묵히 골프만 쳤고 답답해진 이 회장은 골프를 마치고 식사하면서 마침내 원포인트 레슨을 부탁했다. 이때 아놀드 파머가 종이에 써서 이 회장에게 건네준 두 단어가 ‘Head up’이었다고 한다. 골프 칠 때 머리 들지 말라는 얘기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저런 인생 경험이 내게도 제법 쌓였다. 이제는 어떤 모임에 가든 내 윗사람보다 아랫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바야흐로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꼰대병’ 증상의 발현을 조심할 때다. 그 병의 첫손 꼽는 증상이 바로 묻지도 않았는데 자꾸 이래라저래라하면서 충고와 조언을 남발하는 것 아니겠는가. 후배들 앞에서 입이 막 근질거릴 때마다 그간 운동하며 내가 받았던 원포인트 레슨들을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말을 쏟아놓더라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지 않으면 돼지 목의 진주목걸이일 뿐이다. 애정 어린 눈으로 상대방의 문제를 파악하고 그에 꼭 맞는 처방전을 신중히 발행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십 년 이상 온갖 레슨 받으며 헛수고만 거듭하던 내 탁구 꼴이 날 게 뻔하다.
  
하나 덧붙이자면, 사실 내게도 골프칠 때 ‘헤드업 하지 마세요’처럼 만고불변의 진리에 해당하는 원포인트 레슨 콘텐츠가 하나 있다. 병원에서 크고 작은 보직을 맡았을 때마다 조직 구성원들에게 걸핏하면 주지시키던 사자성어로 특히 노사협상장에서 수없이 강조했던 말, ‘역지사지(易地思之)’. 예수님이나 공자님도 이에 대해 한 말씀 하셨을 만큼, 보통 사람들이 여간해서는 지키기 어려운 덕목이다. 이번엔 나의 경험을 보태 대한민국 도처에서 패가 갈려 서로 갈등하고 싸우는 사람들에게 원포인트 레슨을 해보고 싶다.
  
“어느 날 의사가 환자가 되어 입원해보니 의료진의 말 한 마디, 얼굴 표정 하나가 환자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깨닫게 됩니다. 확률이 낮다면서 무덤덤하게 설명하는 시술의 부작용이나 합병증 따위도 얼마나 두려울 수 있는지 알게 되었구요. 제가 겪은 것처럼 서로의 입장이 바뀌었을 때 공감대가 크게 넓어지는 경험이 우리 사회 곳곳에 퍼져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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