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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맛의 추억, 헌법재판소, 수술실 CCTV
쇠맛의 추억, 헌법재판소, 수술실 CCTV
  • 전성훈 변호사
  • 승인 2023.09.12 1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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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65)

얼마 전 부산에서 업무상 행사가 있었다. 행사 후 저녁식사 자리에는 ‘대선’ 소주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자 부산에 연고를 두고 있는 분이 식당측에 ‘C1’ 소주로 바꿔달라고 했다. 식당측이 ‘C1’ 소주는 시원한 것이 없다고 하자, 미안하지만 가게에서 사다 줄 수 있냐고 부탁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날은 식당에서 밖에서 사온 소주를 마시는 흔치 않은 경험을 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필자는 수십 년을 마셨음에도 소주 맛을 도무지 구별하지 못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맛을 구분할 수 있었던 소주가 있는데, 그건 ‘금복주’였다.
 
90년대 초반 친한 친구가 군에 입대했다. 그 친구는 기초군사교육 후 운전병으로 배치받아 특기 교육을 위해 경북 경산시에 있는 군부대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친구로부터 ‘가족과 영내 식사 면회를 명받았다’는 ‘이등병의 편지’가 도착했다. 워낙 친한 친구였기에, 필자 역시 친구 가족들과 함께 경산으로 갔다. 대한민국에 KTX라는 것이 생기기 10여 년 전이었고, 고속버스, 시외버스, 시내버스를 갈아타면서 부대로 가는데 거의 하루가 걸렸다.
 
친구 어머님께서 바리바리 싸오신 진수성찬으로 3분 같은 3시간의 식사가 끝난 후, 그 친구는 폭풍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내무반으로 복귀했다. 어머님도 울고, 여동생도 울고, 필자도 울었다. 그렇게 면회를 마치고 나와, 친구 아버님께서 멀리까지 함께 와줘서 고맙다면서 아들의 친구에게 저녁을 사주셨다. 무엇을 먹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투명한 병, 빨간색 라벨, 일본 맥주 에비스와 비슷한 로고의 25도 ‘금복주’의 맛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어떻게 물에서 쇠맛이 날 수 있지?’라고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친구 아버님께서 고맙다고 따라 주시는 술이라 사양도 못하면서, 친구 아버님 앞임에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크으으-ㅋ’ 소리를 내면서, 마시고 또 마셨다.
 
서울로 돌아와서, 필자는 금복주의 고통을 금붕어처럼 금새 잊어버리고선, ‘설마 소주에서 쇠맛이 났을 리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술집 메뉴판에서 금복주를 찾아 보았지만, 도무지 서울에서는 금복주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정부가 400여 개에 이르는 소주업체의 난립을 막고 지역업체를 살린다는 목적으로 1976년 도입했던 ‘자도소주 구입제도’ 때문이었다.
 
그런데 수년이 지나서,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도 생소했던 헌법재판소가 ‘자도소주 구입제도는 소주판매업자의 직업의 자유, 소비자의 자기결정권 등을 침해하므로 위헌’이라고 결정했고, 얼마 후부터 서울의 몇몇 술집에서도 금복주가 보이기 시작했다. 법대생으로서 헌법재판소의 무게감을 실감하면서, 필자는 호기심과 설렘으로 금복주를 주문해서 마셔보았다. 맛은? ‘살인의 추억’보다 무서운 ‘쇠맛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1988년 창립되어 올해 35주년을 맞은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쇠맛의 추억’을 되살려 주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책무를 수행하고 있다. 관념적인 그 명칭과는 달리, 헌법재판소는 국민의 기본권을 현실적으로 수호하는 기관이다. 수많은 헌법재판소 결정 중 우리 사회를 크게 변화시킨 몇 가지만 보자. ① 음반.영화.출판 검열제 위헌, ② 동성동본 금혼 헌법불합치, ③ 호주제 헌법불합치, ④ ‘의료광고 전면 금지’ 위헌, ⑤ 혼인빙자간음죄 위헌, ⑥ 공무원시험 나이 제한 헌법불합치, ⑦ 군필자 가산점 위헌, ⑧ 간통죄 위헌, ⑨ 그리고 최근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이렇듯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회상은, 사실 헌법재판소의 선도적 결정에 따른 국회의 후속 입법으로 개선된 것들이 매우 많다.
 
또한 헌법재판소는 ‘권력 간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헌법정신을 수호하고 실질적으로 선언하는 막중한 책무를 지고 있다. 대표적인 결정만 꼽아보면, ① 5.18 주모자 처벌법 합헌, ② 정부의 위안부 피해 외교적 방치 위헌, ③ 국회 법률안 날치기 통과 위헌, ④ 유신 시절 대통령 긴급조치 위헌, ⑤ 친일파 재산 몰수 합헌, ⑥ 대통령 탄핵 기각/인용 등을 들 수 있다.
 
지난 주 대한의사협회와 대한병원협회는, 수술실 내부에 의무적으로 CCTV를 설치하게 하고 이를 위반한 경우 처벌하는 의료법 조항, 이른바 ‘수술실 CCTV법’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뜨거운 여름 햇빛 아래에서 시종일관 진지하게 이뤄진 심판청구서 제출 행사에는 중앙 방송사들과 일간지들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언론의 궁금증은 엇비슷했다. ‘대리수술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데, 의사들은 왜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에 대해서까지 반대하는가’라는 것이다.
 
수술실 CCTV법에 대한 의료계의 입장은 분명하다. 첫째, 대리수술 방지를 위해서라면 굳이 수술실 내부에 CCTV를 설치할 필요가 없다. 둘째, 의료진의 직업수행의 자유와 인격권 등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한다. 셋째, 상시 감시상태에 놓이는 의료진에게 집중력 저하와 과도한 긴장을 유발하여 소신진료를 위축시키고 방어진료를 조장한다. 넷째, 의료인력의 외과 기피 현상을 가속화하여 필수의료 붕괴를 재촉한다. 다섯째, 결과적으로 극소수 환자의 의구심 해소를 위해 절대다수 환자들을 더 큰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는 것이다.
 
의료계 극히 일부에서는 위 헌법소원심판 청구에 대해 ‘보여주기식’ 행사라거나, ‘왜 이제야’ 청구하느냐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선 헌법소원심판 청구와 같은 중요한 절차가 ‘보여주기식’ 행사라는 비판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청구시기에 대한 비판 역시 헌법소원 실무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헌법소원은 원하는 때마다 청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데다, 법률 시행 전에 청구하면 원칙적으로 각하사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협과 병협은 법률대리인 선정에도 신중을 기해, 헌법재판소장을 역임한 중량감 있는 변호사를 선임한 후 헌법소원심판 청구의 내용 및 시기 등을 충실히 협의하여 준비했다. 
 
2천 년 전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외쳤다. 마찬가지로, 세계에 유례없는 대한민국 수술실 CCTV법에 대한 헌법적 판단의 주사위는 이제 던져졌다. ‘판옵티콘의 눈 아래에서 당장은 의료인들이 신음하겠지만 결국 피해는 국민들에게 오롯이 돌아갈 것’이라는 의료계의 절실한 호소를, 지난 35년간 헌법적 소임을 다해 온 우리 헌법재판소가 무겁게 받아들여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할 가능성이 큰 법률에 대해 국회가 다시 한 번 숙고할 수 있도록 하는, 헌법의 수호자로서의 사명에 부합하는 판단을 내려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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