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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세계를 마주하는 경험
내면세계를 마주하는 경험
  • 홍영준(원자력병원 진단검사의학과)
  • 승인 2023.09.1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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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준의 공릉역 2번 출구 (89)

“그대의 눈을 자기 안으로 돌려보라. 그대의 마음속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한 1000개의 지역을 만나게 되리니. 그곳들을 여행하고, ‘자신’이라는 우주의 전문가가 돼라”  

화장실에 들고 들어간 조간신문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 나오는 한 구절을 만났다. 좀 이상한 연결이지만 이 문장을 보면서 자꾸만 며칠 전에 받은 위내시경 생각이 났다. 

위암 조기진단을 위한 가이드라인은 위내시경 검사를 40세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난 국가가 권고한 시점이 진작 도래했음에도 그 뒤로 월드컵이 네댓 번 열릴 때까지 애써 외면하다가 최근 괴로운 소화기 증상이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생애 최초의 위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할 일은 많았고 시간은 너무 빨리 흘렀다는 게 건강검진 지연의 일차적 변명이지만 내겐 그럴싸한 핑계가 하나 더 있다. 

10여 년 전 <과잉 진단(overdiagnosis)>란 책을 번역할 때였다. 한국어판 서문을 부탁하느라 원저자인 다트머스 의대 길버트 웰치(H. Gilbert Welch) 박사와 몇 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메일에서도 그의 지론은 한결같았다. ‘환자’가 아닌 ‘건강인’이 종합검진을 위해 병원에 갈 때는 반드시 과잉 진단의 위험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 

공교롭게도 <과잉 진단> 번역본이 출간되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국내에서는 갑상선암을 둘러싼 과잉 진단 논란이 크게 일었고, 이를 주도했던 고려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연구진은 2014년 웰치 박사와 협력하여 저명 학술지 NEJM에 충격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바로 1993년 대비 2011년에 우리나라 감상선 암 발병이 무려 15배 이상 증가했다는 내용이었다. 복부 초음파 검사를 받으러 온 사람에게 ‘서비스’로 목까지 봐주는 사례에서 보듯, 조기 검진의 남발을 주된 원인으로 추정한 이 논문의 제목은 민망하게도 ‘한국의 갑상선암 대유행(Korea’s Thyroid-Cancer ‘Epidemic’)’이었다.

갑상선암에서 촉발된 국내의 ‘과잉 진단’ 논란은 전립선암이나 유방암처럼 비교적 진행 속도가 느리고 예후가 크게 불량하지 않은 암을 대상으로 전선이 확대되고 있다. 건강인이 각종 검진을 통해 질환을 조기에 발견하려는 노력이 실제로 과연 건강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논쟁. 검사를 받는 과정에서 다양한 부작용을 겪을 수 있기에 건강검진의 득실을 냉정히 따져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매사 그렇듯, 극단에 치우친 ‘근본주의자’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 ‘조기진단을 위한 검진은 많이 받을수록 무조건 좋다’라는 주장과 ‘증상이 없는 한 어떤 검진도 받을 필요가 없다’라는 주장 모두 그런 극단이요 도그마가 아닐까 싶다.

다소 곁길로 이야기가 샜지만, 웰치 박사의 메일에서 내 눈길을 끌었던 건 당시 50대 중반이었던 그가 그때까지 내시경을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위암이나 대장암 선별검사로서 내시경의 의미가 갑상선암이나 전립선암의 무분별한 선별검사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소화기 증상이 생길 때까지 내시경을 보류하겠다고 했다. 내시경 받기가 싫어 핑곗거리를 찾고 있던 내게 웰치 박사의 생각이 신속하게 전염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시간이 자꾸 흐르다 보니, 나이 들어 대장내시경은 고사하고 위내시경조차 받지 않는 나를 가족들은 염려했고 혹자는 신기하게 생각했다. 매번 “과도한 건강 추구가 오히려 병을 키운다”라는 논리로 내시경 받으라는 회유와 위협을 피해 가던 중, 병원장 시절 모 케이블 TV 건강프로그램 PD로부터 전화가 온 적이 있다. 모든 경비를 방송국에서 부담할 테니 건강검진을 받아보라는 요청이었다. 암병원의 병원장이 어떤 기준으로 자신의 검진 종목을 선택하는지 그 과정을 하나하나 카메라에 담고 싶다고 했다. 당연히 내시경 검사는 필수코스였다. 나는 그 방송국 제작진에게 ‘과잉 진단’의 개념을 자세히 설명해주면서 완곡히 거절 의사를 밝혔다. 웰치 박사 이야기도 보태면서, 내가 결코 무서워서 내시경 검사 같은 거 안 받으려는 게 아님을 누누이 강조했다.

시간은 또 흘렀고 두어 달 전부터 갑자기 식도와 위에 이물감이 생겼다. 소화가 안 되면서 가끔 명치가 쓰린 증상도 나타났다. 소화제나 제산제로 차도가 없었기에 마침내 위내시경을 예약했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는 검사지만 그 대상이 나 자신이 되고 보니 사전 준비 과정이나 사소한 시술 절차 하나하나가 다 신경 쓰이고 염려스러웠다.

베테랑인 소화기내과 동기가 내 뱃속을 들여다본 뒤 잠이 아직 덜 깬 나를 모니터 앞에 앉히고 이것저것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걱정했던 식도는 정상이지만 위벽은 좀 얇아져 ‘위축성 위염’ 소견을 보이며, 십이지장 쪽에는 1센티 정도 크기의 혹 같은 게 있어서 떼서 조직검사를 보냈단다. 나쁜 것 같진 않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사흘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위내시경 검사는 졸지에 나의 내면세계를 마주하는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장기간의 스트레스에 혹사당하고 걸핏하면 집어먹는 소염진통제에 공격당해 기진맥진한 위벽을 똑똑히 보았다. 또 생물학적인 내면세계에 더하여, 대범한 척해도 실은 겁이 많고 불안에 잘 사로잡히는 나의 정신적 내면세계 역시 민낯 그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한 차례의 내시경만으로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지역이 무수히 많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란 우주를 알기 위해 수시로 눈을 자기 안으로 돌리는 시간을 만들고 싶다. 내면세계와의 마주침은 곧 실존적 깨달음과 새로운 다짐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웰치 박사의 나이는 이제 대략 70세 전후가 되었다. 지금쯤은 아마 내시경도 몇 차례 받았을 걸로 짐작한다. 억울한 논문표절 시비로 직장까지 옮겨야 했으니 속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시경의 도움을 받아서건 아니건 자신의 내면세계와 마주하는 경험이 많이 있었으리라 믿는다. 그는 내과 전문의고 보건학 분야의 대가지만 그렇게 건강검진이 내면적 성숙을 가져오는 요인이 될 수 있음도 향후 연구에서 고민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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