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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복규 교수의 의료만필(醫療慢筆) 15] 의학, 국가, 그리고 근대성
[권복규 교수의 의료만필(醫療慢筆) 15] 의학, 국가, 그리고 근대성
  • 의사신문
  • 승인 2023.08.29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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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복규 교수(이화의대 의학교육학교실)

우리나라 헌법은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제36조제3항)’라고 하여 국가의 보호 의무를 명문화하고 있다. 또 ‘생명권’과 같은 것은 헌법에 명시적으로 나와있지는 않지만 그간의 해석과 통설은 우리 헌법이 그와 같은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고 본다. 어쨌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근대 국가의 가장 큰 의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 때문에 우리 국가는 의료 행위에 대하여 온갖 법률을 만들고 엄격하게 이를 규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생명과 건강의 보호는 지나치게 나아가면 국가가 국민의 모든 생활을 일일이 간섭하게 된다는 일종의 부권주의(paternalism) 혹은 전체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사실 국민의 건강을 엄격하게 보호하려 한다면 국가는 우선 술과 담배를 금지하고 모든 국민에게 일정 시간의 운동을 강제하고, 이를 어길 경우에는 벌금을 물리는 등 처벌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터무니없다는 것은 모든 이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국가의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대한 보호 의무는 불특정 다수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어떤 건강상의 위험에 노출된다든지, 혹은 기본/필수 의료를 받지 못하게 된다든지 하는 영역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의사결정능력이 있는 국민이 본인의 뜻에 의해 필수적인 치료를 거부한다면 국가는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나라의 연명의료결정법 역시 그러한 정신 위에 입각해 있다.

그 때문에 국가가 간여하는 의료의 영역은 과학적, 근대적, 표준적인 범위 안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바로 공적인 것이다. 사실 국민은 원한다면 병 치료를 위해 무속인에게 갈 수도 있고, 종교인에게 갈 수도 있고, 자연치료니 기치료니 하는 각종 요법사에게 갈 수도 있다. 이들이 의료인의 행세를 하지 않는 한, 또 그들이 의료인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는 한 국가는 이를 규제할 수 없다. 이러한 이들을 찾는 국민들은 자유의사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어떤 피해를 당한들 그것까지 국가가 책임질 필요는 없다.

흔히들 서양 근대의학은 무슨 자연과학(생물학이나 생화학)을 건강/질병 현상에 적용하는 응용과학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서양 근대의학이란 근대(modernity)라는 매우 복잡한 시스템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이는 세계적으로 표준화되어 있고, 그것의 불확실성과 한계 역시 통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자연과학에 입각한 의학이어서만이 아니라 객관적, 표준적이고 스스로 그 한계를 알고 있는 의학이기 때문에 공적-‘공공’이 아니다-영역에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 어느 의사가 본들 환자의 진단은 대개 일치하며, 치료 방법 등에 대해 의사마다 약간의 견해차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역시 일련의 범위 안에 놓여 있다. 진전된 암 환자에 대해 항암화학요법을 우선할지, 방사선 치료를 우선할지 등등은 의료시스템과 의사의 경험 및 지식의 편차에 따른 차이가 있을 뿐 그러한 차이 역시 합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점성술을 믿고 있고 별점을 치러 가지만 이를 국가가 규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국립천문대에서 점성술에 따라 어떤 연구를 한다면 이는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많은 이들이 믿는 사주팔자의 바탕이 되는 달력은 예전 조선시대에는 관상감이라는 곳에서 맡아보았지만 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관상감에서 했던 방식으로 별을 관측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별을 관측하고 천문 현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 나름의 과학성과 합리성을 주장할 수 있지만, 오늘날 그들의 방식을 그대로 쓰자고는 하지 않는다. 만약 그들의 방식을 ‘과학화, 현대화’한다고 하여 현대 천문학의 방법론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대체 ‘우리 조상의 고유한 천문학’이라고 현대 천문학과 별개로 구별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모든 의사가 알고 있듯이 현대 의학도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건강과 장수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여 그 간극에서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어쨌든 인간은 무슨 해결책이든 추구하기 마련이고, 자신이 믿는 바를-터무니없는 믿음이라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국가가 여기에 부화뇌동하면 이를 과연 근대 국가라 할 수 있겠는가? 보편적, 국제적, 합리적, 과학적이지 않은 ‘의술’에 공적 의의를 부가한다면 그것이 무슨 근대 국가이겠는가? 사람 사는 곳 어디서나 희한한 것을 믿고 의지하는 이들은 있기 마련이니 그런 것들은 그들의 사적 소비 영역에 머무르게 놓아두면 되지 무슨 ‘우리 고유, 민족’이라는 구호 아래 공적 영역으로 끌어들이는가? 또한 그들이 그런 사적 영역에서 무슨 ‘치료’를 소비하다가 잘못되면 그 역시 스스로 책임질 일이지 왜 국가가 끼어들어야 하는가? 

대법원이 한의사에게 뇌파계를 사용하여 치매, 파킨슨병을 진단하게 하겠다는 판결은 그래서 근대 국가로부터 한참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병을 이해하고 진단할 그들의 능력을 떠나서 근대 과학이 아닌 전통 패러다임에 입각하여 진단과 치료를 한다는 그들의 정체성에서 볼 때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판결은 그들의 행위에 공적 보증을 해 주는 것이다. 점성가도 천체망원경을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국가가 이에 간섭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한의사의 진료 행위는 국가의 인정도 받고, 나아가 건강보험공단의 수가도 받는다. 이것이 이 사안의 근본적인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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