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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문인회 수필릴레이 4] 어머니
[의학문인회 수필릴레이 4] 어머니
  • 의사신문
  • 승인 2023.08.2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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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우 관악 모세마취통증의학과의원장

어머니를 만났다. 지방의 한 대학병원 2층 신장투석실 앞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앉아 있었다. 양 손목에는 주사바늘이 꽂혀있고 휠체어 등받이 양쪽의 기둥에 걸린 수액봉지에서 내려온 비닐관을 따라 약물이 한 방울씩 어머니의 양팔 혈관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간과 담낭에도 염증인지 종양인지 질환이 중복되어 있다고 하였고 거기서 나오는 체액을 배 밖으로 뽑아내느라 관을 삽입한 상태였다. 환자복 앞섶에 매달린 비닐주머니에 짙은 초록색의 담즙 같기도 한 진액이 그득하게 차 있다. 

오기 전에 동생으로부터 이미 설명을 듣고 왔지만 막상 보니 참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심하고 오래된 당뇨병으로 양쪽 신장이 다 망가져 일주일에 세 번씩 혈액투석을 받아야만 하였는데 와중에 간과 쓸개에도 질병이 생겼고 또 최근 어느 날에는 심장혈관도 막혀서 소위 스텐트 시술도 받은 터였던 것이다. 더 희어질 수 없을 정도로 희어진 백발에 어머니에겐 참 낯설어 보이는 환자복 차림, 게다가 양팔의 주사장비에다 복부의 간담 유출액 주머니까지 주렁주렁 달린 모습이라니. 참으로 죽음이 한치 앞이요 내일 돌아가셔도 놀라지 않을 만한 형상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 이 아들이 다가가 손을 잡으니 늘어진 얼굴 주름살이 금새 펴지고 눈빛이 달라지고 손가락 힘이 젊은이처럼 굳세기만 하구나. 온 몸에 의료기구를 그렇게 매달고서도 목소리도 낭낭하게 “나는 괜찮다” 하신다. 또 증손자 이름을 부르신다. “00이는 잘 크나”. 내 손자 이름을 또박또박 부르며 웃으시는 것이다. 아 참으로 인간의 영혼은 이다지도 강인하고 용맹하단 말인가. 

휠체어에 앉은 처참한 모습의 병든 어머니가 마치 서울 광화문에 서 있는 무쇠로 된 이순신장군 보다 더 씩씩해 보이는 듯하다. 

어머니, 참 함부로 부르고 싶지 않은 이름이다. 이 일을 생각하니 슬프다. 고등학교 때에 배에 무슨 종양출혈이 있어서 수술을 받으셨다. 시골에 병원이 없으니 마산에 오셔서 수술을 받았다. 

시험공부 하느라 저녁에 잠깐 병실에 들렀더니 갑자기 아들 눈을 바라보며 “나는 죄 지은 게 없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속이 서늘하였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이 땅의 삶에 대해서 정리하는 말을 한다더니 어머니가 수술중에 죽을까봐 나에게 미리 자기 인생을 한 문장으로 고백하는 듯 하였던 것이다. 

그때에 내 인생 처음으로 나의 모친이 한갓 두려움 많은 작은 여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느꼈다. 나중에 내가 고등학교 마치고 의과대학에 입학하니 어머니가 주위에다가 “내가 병원에 입원했더니 아들이 의사가 되려고 마음먹은 것이리라” 했다는 말을 들었다. 

내 어머니는 행동이 빠르고 기억력이 좋고 매사 성실하고 항상 낙천적이셨다. 내 어머니의 가장 즐겨쓰는 단어는 “나는 괜찮다”, “참 좋다”였다. 나는 이 분 덕분에 인간이 남을 원망하거나 스스로 못났다는 말을 하거나 미래가 어둡다고 말하는 것을 마음에 묻히지 않게 되었는데 이것은 내 인생의 정말 소중한 자산이다. 그러나 아들인 내가 보기엔 실상 그녀의 삶은 고통스럽고 힘겨운 일들의 연속이었다. 

내가 어릴 때에 어머니가 아침 밥상에 도시락을 5개나 포개어 놓고 싸는 것을 보았는데 그때의 시골 부엌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하고 국을 끓여야만 했었다. 5개의 도시락은 아버지 것과 우리 형제들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삶이 한 달, 두 달도 아니고 수년간이나 가능했던 것인가. 시골집엔 수도도 들어오기 전이라 밥을 지으려면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에 가서 물을 길어 와서 끓이고 삶고 그릇을 씻고 세수도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일을 다 하셨다. 물론 시부모와 시동생들 일들은 기본이었고. 그리고 “괜찮다”고 하신 것이다. 집안엔 이웃들이 자주 오갔고 어머니는 늘 밝은 목소리로 웃으셨다. 

아 지금 나는 한 인간을 보고 있다. 의사인 나도 모를 무슨 무슨 주사기를 따라 양팔로 주사액을 맞으며 휠체어에 앉아서 허리에는 간인지 위장인지에서 흘러나오는 시커먼 체액을 모으는 주머니를 달고서 또 그토록 흰 머리카락을 하고서는 모처럼만에 서울서 왔다는 일생 뺀질뺀질하기만 했던 둘째 아들을 감동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한 여인이다. 나의 어머니이다. 

위대하고 신성한 여인의 여든 넷 인생의 모습과 같다. 나는 어머니 손을 잡고 기도하였다. 주 예수여 우리 모두의 인생을 너그러이 받아주소서. 그리고 그 병원에 별로 오래 머무르지도 않고 또 어머니를 향해 잠깐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차표시간 보다 약간 일찍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서 서울로 오는 차에 올라갈 참이다. 오늘부터 대전통영 고속도로 창밖의 풍경이 영원히 푸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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