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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에 대처하는 방법
권태에 대처하는 방법
  • 홍영준(원자력병원 진단검사의학과)
  • 승인 2023.08.2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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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88)

미국 애너하임에서 열린 학회에 다녀왔다. 코로나 유행 기간엔 엄두도 못 내다가 3년 만에 나선 해외 출장길이었기에 설레던 기분은 딱 인천공항 갈 때까지만이었다. 하늘길 열두 시간은 지겨웠고 기내식은 맛이 없었다. 폭염과 열대야에 몸서리를 치면서 서울을 떠났건만 LA의 여름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늘이 조금 시원하긴 했어도 호텔에서 학회장까지 1마일 남짓한 길을 걸어가려면 매번 온몸이 땀에 푹 젖었다. 게다가 걸어가는 길 곳곳에서 만나는 노숙자들은 디즈니랜드로 유명한 가족 휴양지의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불편한 마음은 학회장으로까지 이어졌다. 3만 명 넘게 참여하는 진단검사의학 분야 최대의 학술대회 겸 전시회였음에도,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하여 강의실이나 전시장 구석구석을 열심히 찾아다니며 지식을 습득하게 만들던 예전의 열정이 살아나지 않았다. 포스터 하나 달랑 발표하고 나서 주로 학회장 커피 부스를 전전하던 내 머릿속엔 냉소적인 영어 관용구 하나가 계속 맴돌았다. ‘Been there, done that, got the T-shirt (같은 곳에 가 보았고, 같은 일을 해보았고, 심지어 기념 티셔츠까지 얻어 왔지)’
  
권태로움은 학회장 안에서만 머물러있지 않았다. 과거 미국에 올 때마다 감탄했던 풍요로움(주로 음식이나 커피의 엄청난 양 때문이긴 했지만)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빈부격차 문제와 총기사고로 도배된 뉴스 탓에 TV를 켜기가 싫었다. 옛날엔 아울렛(outlet)은 물론이고 동네 몰(mall)에 있는 식료품점에만 가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는데, 그런 소소한 즐거움이 되돌아올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호텔 옆 디즈니랜드에서 매일 밤 쏘아대는 폭죽조차 시차 적응을 방해하는 소음으로만 여겨졌다.
  
공부도 할 겸 기분 전환도 할 겸, 기대를 한 보따리 가지고 다녀온 미국 학회는, 실망스럽지만 굳이 피검사로 확인을 안 해도 나의 테스토스테론이 크게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 자리였다. 귀국 이후에도 매사에 좀처럼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불쑥 찾아온 권태를 극복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어느 날 이상의 단편소설 <권태>가 떠올라 눈에 불을 켜고 다시 읽어보았다.
  
이상 본인으로 생각되는 주인공이 어느 여름 벽촌에서 느끼는 참을 수 없는 권태감이 줄줄이 등장한다. 단조로운 시골 풍경이 권태롭고, 매일 보는 개들이 권태로우며, 심심풀이로 같이 장기를 두는 최 서방 조카에게 판판이 이기는 것 또한 권태롭다. 개들이 교미를 하는데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소들은 식욕의 즐거움도 모르고 되새김질만 하는 지상 최대의 권태자다. 급기야 주인공은 멍석 위에서 자는 사람들을 보며 ‘먹고 잘 줄 아는 시체’라고 생각한다.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이 짧은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권태의 묘사는 충분히 공감이 간다. 권태에 찌든 동네 아이들이 개발한 기상천외한 유희를 묘사하는 장면을 보며 읊조리는 주인공의 기도 역시 가슴을 파고든다. 아이들이 최후로 개발한 창작 유희는 쭈그려 앉아 똥 싸기 시합을 하는 것이었고 빨리 못 누는 아이가 낙오자요 놀림거리가 된다. 이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면서 주인공이 기도한다. “아, 조물주여, 이들을 위하여 풍경과 완구를 주소서.” 다행히 이 기도의 의미를 내가 나름대로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노사연씨와 함께 원자력병원의 오랜 홍보대사인 이무송씨(나는 ‘무송대사님’이라 부른다)가 얼마 전 병원 내 방을 방문했다. 살은 쏙 빠지고 얼굴은 새카맣게 탄 우리 무송대사님은 최근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곳을 찾는 이들이 대개 그렇듯, 분명 털어버리고 싶은 삶의 번뇌가 있거나, 답을 얻고 싶은 인생의 질문이 있었으리라. 거기에 일상의 권태 또한 장장 800km의 도보 순례를 떠나게 한 원인 중 하나였으리라.
  
특유의 입담으로 고생스러웠던 산티아고 여행기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무송대사님 모습에 나와 병원 우리 과 선생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이 동일한 목적지를 향해 매일 걸어가며 어떻게 친구가 되고 어떤 우정을 나누는지 이야기해 주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절대자를 생각하면서 얻게 되는 깨달음도 전해주었다. 피레네 산맥의 하늘과 메세타라 불리는 스페인의 평원은, 권태가 발을 들여놓을 틈을 주지 않는 숨 막히는 ‘풍경’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 몇 일 뒤 주말에는 의대 동기 K 교수와 골프를 같이 쳤다. 운동 후 점심을 먹기 위해 찾은 장어집에서 그는 들고 온 007 가방을 열더니 조립식 와인 잔 네 개와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주섬주섬 꺼냈다. 그러더니 식사 시간 내내 와인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그게 깜짝 놀랄 정도로 전문가의 식견이었다. 코로나로 회식이 줄어든 걸 기회로 삼아 그 기간에 WSET (Wine & Spirit Education Trust)란 기구에서 발행하는 국제 와인자격증을 여럿 땄다고 한다.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던지 포도 종류, 토양, 기후 등에 관한 온갖 숫자들을 아직도 다 정확하게 암기하고 있었다.
  
K는 요즘 본인의 전공 이외에 와인에 관한 전문성을 인정받아 학회나 의료기관에 특강 연자로 초청을 받는다고 한다. 아직 직접 들어보진 못했지만 그가 얼마나 행복한 표정으로 강의할지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그 즐거움 앞에 권태가 비집고 들어갈 여지는 없을 것이다. 이상이 기도한 권태 극복의 두 번째 요소 ‘완구’가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시골 소년들에게 풍경과 완구를 간구한 이상의 기도가 실제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얼추 걸맞은 사례를 살펴보았지만 난 그 외에 또 다른 방법이 있음을 안다. 바로 풍경과 완구를 경험하거나 소유한 사람들과 대화함으로써 자극을 받는 것이다. 일종의 간접 체험이긴 하지만 훨씬 수월한 방법이다. 언제나 생기가 넘치는 사람들은 다 비결이 있는 법. 이제부터라도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 그 노하우를 들어봐야겠다. 활력 넘치는 몇몇 지인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벌써 권태가 슬그머니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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