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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었던 김 할머니와 독일 할머니
자살하고 싶었던 김 할머니와 독일 할머니
  • 의사신문
  • 승인 2023.08.08 10:0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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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64)

자살방조죄라는 죄가 있다. 형법은 ‘사람을 방조하여 자살하게 한 자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나쁜 짓을 한 것이니 당연히 처벌받아야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법률가들의 생각은 다르다.

타인을 교사.방조하는 행위는 아무 때나 처벌되는 것이 아니다. 일단 타인이 처벌받을 행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행위를 교사.방조한 때에만 처벌된다. 독박육아에 지친 아내에게 ‘남편이 엄청 나쁜 사람이니 당장 이혼하라’고 교사해서 그 아내가 이혼했다고 해도, 교사한 사람은 처벌되지 않는다. 이혼은 처벌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살은 처벌되는 행위인가? 당연히 아니다. 그래서 자살을 교사.방조해도 원칙적으로 처벌할 수 없기에, 이에 관해 오랜 법리 논쟁이 있어 왔다. 법률 선진국인 독일에서는 이러한 원칙적 법리에 기초하여 최근까지 자살방조죄를 처벌하지 않았다. 반면 우리나라는 독일 법을 이어받았음에도 자살방조죄를 별도로 규정하여 처벌하고 있다.

그러면 다른 나라들은 어떤가? 없는 나라가 더 많다. 미국을 예로 들면, 병리학자인 ‘죽음의 의사’ 잭 케보키언은 환자 스스로 약물을 주입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 1990년부터 1998년까지 불치병 환자 130명의 자살을 도왔지만, 미시간 주 법상 처벌할 법이 없어 처벌되지 않았다. 결국에는 어떤 루게릭 병 환자가 주사기를 누를 힘이 없자, 대신 눌러 주었다가 ‘살인죄’로 처벌받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2014년 메사추세츠 주의 17세 여성이 18세 남자친구에게 자살하라고 압박하여 자살하게 한 사건에서도, 그녀는 ‘과실치사죄’로 처벌받았다.

그런데 얼마 전 독일에서는 논란 끝에 자살방조죄가 신설되었다가 곧 무효화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보라매병원 사건과 김 할머니 사건을 겪은 우리 의료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2010년 판결: 한 독일 할머니는 평소 딸에게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라는 말을 해 왔다. 할머니는 69세에 뇌출혈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딸은 어머니의 뜻과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어머니의 영양공급튜브를 가위로 잘랐다. 곧 튜브는 새 것으로 교체되었지만, 2주 후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딸과 변호사는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됐다.

하급심 법원은 딸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지만, 오히려 변호사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변호사는 불복했고, 2010년 독일 연방대법원은 변호사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면서 ‘생명유지장치에 의존하고 있는 불치병 말기 환자라면, 환자가 원할 경우 환자의 보호자는 생명유지 조치를 중단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독일인 정신질환자, 장애인 7만 명을 ‘민족 개조’ 명목으로 안락사시켰다. 그래서 오랫동안 독일에서 안락사라는 단어는 금기어였다. 그럼에도 10여 년 전부터 위와 같은 취지의 하급심 판결들이 이어졌고, 독일 연방대법원은 최종적으로 위와 같이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환자의 ‘죽을 권리’를 점차 확대해 나가는 판결들이 이어졌다.

둘째 2015년 입법: 문제는 이러한 독일 법원의 방향성에 대해 독일 의회가 반대했다는 점이다. 독일 의회는 20년간의 논쟁 끝에 2015년 360 대 233으로 ‘자살조력죄’를 형법에 신설했다. 이로써 자살에 대한 ‘영업적’ 방조행위가 금지됐다. 독일 의회는 의료인이나 자살조력단체들이 자살조력을 영업적(=상업적)으로 행하여 의료서비스의 한 유형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셋째 2020년 판결: 그러자 불치병 환자들, 자살조력단체들, 호스피스 전공 의사들, 그리고 환자의 죽을 권리를 조력하는 변호사들이 위 ‘자살조력죄’ 조항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2020년 ‘생명 종결에 관한 자기결정은 인간의 가장 고유한 기본권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기준과 선택에 따라 이를 결정할 자유가 있고, 이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존중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 권리에는 제3자, 특히 전문적 조력이 가능한 의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포함된다’고 판결했다. 즉 ‘영업적’ 자살조력뿐만 아니라 ‘의사의’ 자살조력을 받는 것도 막아서는 안 된다고 선언한 것이다.

작년 6월 국회에 이른바 조력존엄사법이 발의됐다. 말기 환자이면서 참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경우, 환자 본인의 의사에 따라 조력존엄사를 희망하는 경우 등 일정한 요건에 해당하면 ‘의사의 도움을 받아’ 자살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연명의료법 개정안이 발의된 것이다. 

여론은 표면적으로는 호의적이다. 생애 마지막 6개월의 의료비가 평생 의료비와 맞먹는 상황을 직간접으로 경험한, 아니면 밤낮으로 가족의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어디에 힘들다고 하소연할 수도 없는 병수발을 해 본 우리 국민들은, ‘적극적 안락사’의 허용에 일견 공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소극적 안락사’, 즉 연명의료 중단 결정이나 호스피스.완화의료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것이다. 또한 인간의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선언하고 있는 기존의 법체계와 상충된다. 같은 이유로 다른 나라들도 매우 조심스럽게 허용 여부를 검토하고 있는 단계이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이로부터 야기될 새로운 윤리적 문제와 사회적 갈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문제와 갈등을 해소할 만큼 성숙했다고 볼 수 있는지도 충분히 생각해 봐야 한다. 자칫하면 ‘존엄하게 죽을 권리’는 ‘적절한 때 죽을 의무’로 변질될 수 있다. 호스피스.완화의료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정책적 결단과, 막대한 비용을 공동으로 부담하겠다는 사회적 합의가 없다면 말이다.

게다가 ‘의사의 조력’을 인정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생명을 돌보고 지킬 것을 서약한 의사들에게 생명을 빼앗는 역할을 입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의사들에게 ‘아수라 백작’이 되라는 요구와 다르지 않다. 게다가 의료와 관련된 모든 잘못이 ‘기승전의사’로 귀결되는, 심지어 이를 따지는 방식도 형사고소로 이뤄지는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 현실에서, 아무런 보완 입법도 없이 ‘환자가 원하니 의사들이 자살에 협력하라’는 요구는 더없이 폭력적이다. 

국회는 이른바 조력존엄사법을 계속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대등하게 존중받아야 할 의사들의 양심의 자유 역시 진지하게 고려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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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니 2023-08-09 14:27:43
이번 국회엔 의원들이 내년 총선에만 신경쓰느라 논의조차 못하고 폐기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합니다. 국민을 위한다는 달콤한 말도 이젠 지쳤어요. 국민들이 원한다는데 귀도 눈도 막으시네요. 반대 목소리에 겁나신 겁니까? 의원님들!

기사에 보니 의사분들은 조력조엄사 시행에 걸림돌만 없애시면 (자살방조죄 구성요건을 스위스처럼 법개정)조만간 협조할 분위기이네요.

암튼 의원분들이나 의사분들 등 찬성부탁드립니다. 여론따라 주셔요.

이상혁 2023-08-08 19:23:36
안락사 시술을 의사분들에게 전담시키는 것은 한 번 더 생각해야봐아할 문제가 맞습니다. 차라리 안락사 담당 공무원을 채용하고, 보건소, 공공의료기관에 근무하면서 환자들에게 찾아가는 안락사 서비스를 제공케하는 것이 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