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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와 백혈병 진단
MBTI와 백혈병 진단
  • 의사신문
  • 승인 2023.08.0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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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준의 공릉역 2번 출구 (87)

최근 한 풍자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원로정치인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인터뷰한 영상이 화제다. 역대 대통령들에 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진 리포터가 별안간 김종인 씨에게 ‘MBTI’가 어찌 되는지 물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김 씨가 이렇게 대답한다. “MB(이명박)란 사람을 내가...”  당황한 리포터는 ‘MB’가 아니라 ‘MBTI’를 물었다고 재차 말했으나 김종인 씨 역시 거듭해서 MB 이야기를 한다. 난감해진 리포터는 결국 같이 간 상사를 돌아보며 “도와주세요”하고 사태수습을 간청한다.

‘간단한 설문을 통해 성격을 알아보는 심리학 도구’ 정도로 MBTI를 이해하고 있던 나 역시 별안간 이런 질문을 받으면 즉답을 못 하고 허둥댈 게 뻔하다. 요즘 젊은이들과 소통하려면 MBTI를 모르면 안 된다는 말까지 들리기에 작심하고 모처럼 공부를 좀 해 보았다. 

2021년 한국리서치 조사에 의하면 당시 18세 이상 대한민국 전체 국민의 52%가 MBTI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특히 그중에 20대는 90% 이상이, 30대는 75%가 자신의 MBTI 결과를 줄줄 꿰고 있다니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이 암호 같은 네 자리 알파벳이 어느새 휴대폰 번호나 SNS 프로필 사진처럼 자기 아이디(ID)의 일부가 된 듯하다.

처음엔 띠나 별자리로 보는 오늘의 운세처럼 그저 재미 삼아 해 보는, 젊은이들의 놀이문화라 생각했다. 하지만 ‘MBTI의 탄생과 이상한 역사’란 부제가 붙은 메르베 엠레 옥스퍼드대 교수의 책, <성격을 팝니다(The Personality Brokers)>란 책을 단숨에 독파하고 나서는 ‘MBTI의 유행이 심각한 사회병리 현상을 초래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우려가 커졌다.

잘 알려진 대로 공동 개발자인 딸 이사벨 브릭스 마이어스(Myers)와 엄마 캐서린 쿡 브릭스(Briggs)와 이름을 딴 이 성격유형 지표(Type Indicator)는 인간의 행동을 구성하는 4가지 척도, 즉 외향(E)과 내향(I), 감각(S)과 직관(N), 사고(T)와 감정(F), 판단(J)과 인식(P)을 기반으로 구성한 93개 문항의 설문지가 기본이 된다. 4가지 척도가 각각 둘 중 어느 한 가지 값을 가지니까 전체적으론 총 16가지의 성격유형이 나오는 셈이다.

결과의 신뢰도와는 별개로 MBTI는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게 분명하다. 엠레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MBTI는 아프리카 언어부터 광둥어에 이르기까지 26개국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해마다 이 검사를 받아보는 사람들이 2백만 명 이상이라고 한다. 시장 규모는 이미 5억 달러를 넘어섰다.

엠레 교수가 분석한 MBTI 열풍은 ‘사람들은 자기를 바로 알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강력한 믿음’에 근거한다. 자기 인식을 통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성찰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푸코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을 관통하는 요체였고 MBTI는 이 오래된 주제에 너무도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 캐서린과 이사벨은 심리학이나 심리치료를 정식으로 공부한 적이 없지만, 자아를 이해하는 문제에 대해 대중이 간단하고 긍정적인 답변에 얼마나 목말라 하고 있는지는 일찌감치 간파한 사람들이었다.

그간 MBTI에 대한 학계의 날카로운 비판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한 마디로 MBTI 성격유형 분류법이란 게 애초부터 비전문가들이 객관적 데이터 없이 오직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만든(소위 ‘내적 추론’이다), 신뢰하기 어려운 이론이란 것이다. MBTI의 4가지 척도 역시 진실은 각각이 정규분포에 가까운데, 이것을 둘로 칼같이 나누어 총 16가지 조합으로 분류하는 것 또한 복잡한 인간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억지라는 지적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어떠한 과학적, 합리적 비판도 작금의 MBTI 열기를 식히기엔 역부족인 듯하다. 남녀소개팅 자리에서 필수자료로 쓰이는 건 물론이고, 채용이나 업무분장에서까지 MBTI를 활용하고 있는 회사들이 꽤 있단다. 이쯤 되면 젊은 리포터가 정치인을 인터뷰하다가 불쑥 MBTI를 묻는 게 전혀 이상한 상황이 아니다.

진단검사의학과 레지던트를 처음 시작할 때 가장 큰 스트레스는 현미경을 보면서 백혈병 진단을 내리는 일이었다. 오진은 잘못된 치료로 이어져 자칫 환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에, 1년차 시절엔 아틀라스를 끼고 백혈병 진단 기준을 매일 달달 외우고 다녔다. 이때 기본이 되었던 것이 소위 ‘FAB 분류’였다.

1976년 미국의 존 베넷을 비롯하여 총 7인(미국 2, 영국 2, 프랑스 3)의 혈액 종양 전문가들은 처음으로 급성 백혈병의 분류체계에 대해 역사적인 논문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FAB(French-American-British) 분류’다. 백혈병 세포의 생김새, 숫자 그리고 몇 가지 기본 세포화학염색 결과를 바탕으로 그룹을 나눈 것이다.

어쨌거나 어렵사리 외운 FAB 분류 하나로 평생 백혈병 진단은 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나날이 발전하는 테크놀로지가 우릴 그렇게 편히 놓아두지 않았다. 유세포분석이나 분자유전, 세포유전 검사의 발달로 알아낸 다양한 정보들을 진단 기준에 반영하여 ‘WHO 분류’라는 복잡한 제안이 1999년에 있었기 때문이다. 

간신히 새로운 기준에 익숙해질 만하면 WHO는 심술궂게도 계속 업그레이드된 기준을 발표하여 진단검사의학과 의사들을 힘들게 했다. 마침내 2022년에 제5판 WHO 기준이 제안되었는데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또 다른 전문가들이 ‘International Consensus Classification (ICC)’이라는 약간 다른 분류법을 내놓고 현재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다.

분류란 이런 것이다. 분류를 통해 치료에 도움이 되고 환자 예후를 좀 더 잘 예측할 수 있다는 증거가 충분히 있다면 언제라도 옛것을 버리고 업그레이드될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 치열한 논쟁 또한 필수적이다. 만고불변인 MBTI 광풍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대중의 찬사와 전문가의 지지를 함께 받는 제대로 된 성격유형 검사가 등장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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