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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문인회 수필릴레이 3]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와 싯다르타(Siddhartha)
[의학문인회 수필릴레이 3]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와 싯다르타(Siddhartha)
  • 의사신문
  • 승인 2023.08.08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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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호 이원의료재단 연구원장 겸 ELSI 대표이사

사춘기 때 읽었던 데미안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데미안이 주인공인지 싱클레어가 주인공인지···. 무슨 내용이었는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읽어보려고 책을 뒤져본다. 그래도 좀 낯설고 어렵다. 에라 집어치우고 헤르만 헤세란 사람이 누구야? 어떤 사람이야? 한번 알아보자. 이렇게 헤세를 알아보기 시작한다.

헤세의 일생

목사 가정에서 1877년 태어나 행복한 유년 생활을 보내고, 누구나 가고 싶은 신학교를 14세에 당당히 입학을 한다. 이때부터 헤세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규율과 복종, 지루한 암기가 이어지는 학교생활에 유달리 적응을 하지 못하는 헤세.

197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우리에게 익숙한 학교생활이 독일에서부터 와서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온 것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마침내 정신병원에 입원도 하고, 연상의 여인에 대한 사랑으로 자살도 기도해 본다. 16세에 신학교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 후 시계공장에서 견습공 노릇도 하다가, 대학가 서점 직원으로 일하면서 마침내 자기의 일을 찾게 된다. 

어릴 때 부모 밑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다가, 갑자기 학교에서 버림받고 가정에서 소통 안되고, 사회에서 적응을 못하는 방관자로 떨어진다. 

거대한 세상의 힘 앞에서, 대항 못하고 불안과 방황 속에 내몰려진 자신의 여린 마음을 ‘수레바퀴 아래서’란 소설로 표현된다. 이 때 나이 29세.

주인공 한스는 부모와 동네 사람들의 환대 속에 들어간 신학교에서 쫓겨나고, 모든 생활이 엉망진창이 된 지경에도, 사랑에 간절한 사춘기 순수한 감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기계공 견습공으로 일하던 중, 동료들과 어울려 술에 잔뜩 취해 집으로 오다가 풀 속에 뛰어들고 만다. 

헤세의 묘사를 살펴보자. 

“1시간쯤 지나 어두워지자, 그는 일어서서 비틀거리며 간신히 고개를 내려왔다”

헤세의 묘사는 이것으로 끝난다. 그리곤 한스의 장례식 장면으로 소설을 맺는다. 한스가 자살이든 실족이든 상관없이 왜 그리 되었는지를 헤세는 뚜렷이 보여준다. 헤세의 글을 자꾸 반복해서 읽게 되는 이유인가 보다. 자기와 똑같은 한스는 결국 세상과 적응 못하는 비극으로 처리되고, 글을 쓰면서 삶의 숨구멍을 찾은 헤세는 좀 더 심오한 내면의 길을 찾아 나선다. 

34살이 되는 1911년에 인도 여행을 한다. 그리고 42살에 그 유명한 데미안을 출간하게 된다.

주인공 싱클레어 역시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점점 알을 깨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불안과 방황 속에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묘사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고 그의 충고를 통해 이 세계는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명쾌하게 분류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이 무엇이지를 차분하게 탐구해간다. 결국 자신이 한 질문의 해답은 결코 남이 찾아 줄 수 없고 답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데미안의 첫 구절부터 의미심장하다.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바로 그렇게 나는 살려고 했을 뿐이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어쩌면 이렇게 어려운 단어 하나도 안 쓰고, 담백하게 시작할 수 있을까?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구도자였으며, 아직도 그렇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헤세는 자신의 문제를 정말로 진실되게 진지하게 오랫동안 고민해온 사람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는 자는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신이면서 악마이고, 재앙이면서 축복이고, 어둠이면서 빛이고, 성과 속이 하나인 아브락사스는 두 세계가 나뉘어 질 수 없는 통합의 세계이며, 개인에게는 자아가 되는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자기의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 비극을 맞은 한스를 그렸는데, 이제는  알을 깨고 내면의 길을 찾아 나서는 “데미안”의 싱클레어를 그렸다. 

가만 생각하면 싱클레어에게 데미안과 데미안의 엄마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가 이상적으로 꿈꾸는 자신의 멘토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젊은이들에게 ‘데미안’은 ‘청년운동의 성경’이라고 부를 정도로 인기를 누리게 된다. 

헤세는 스스로에게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주인공의 삶을 통해 ‘인간은 누구든지 나름대로 삶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는 소중한 존재’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1921년(44세)부터 우울증이 심해져 정신분석 치료를 받게 되면서 정신 분석가 칼 융과 심도 있는 교제를 나누게 된다. 

마침내 45세가 되는 1922년에 싯다르타를 출간하게 된다. 
헤세는 어려서부터 동양 세계와 친숙했다. 부모님이 인도에서 선교사로 일한 적이 있고, 외할아버지 헤르만 군데르트는 인도에서 거의 30년을 보낸 인도 학자였다. 

1차 세계대전으로 끔찍한 대량 살상을 본 헤세는 이제 동양적인 사상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린 사춘기 시절에 절망과 방황 속에 길을 찾는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 보다 한층 더 원숙하게, 명쾌하게 자기 길을 뚜렷이 찾아 나서는 ‘싯다르타’를 보여준다. 

싯다르타 

이제 ‘싯다르타’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자 한다. 

싯다르타는 부처님의 일생을 이야기하는 소설이 아니다. 부처님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싯다르타라는 청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알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과거를 부정하며 수행에 몰두하는 싯다르타. 그는 명상을 하고, 온갖 잡념에서 생기는 감각적인 사고를 비움으로써 자기 초탈의 길을 간다. 그는 이러 저런 방법을 배워 수천 번 자아를 버렸고, 며칠 동안 무아의 경지에 머무르기도 한다. 하나 아무리 자아를 떠나가도, 그 끝은 결국 자아의 세계로 되돌아오기 마련이었고, 그 굴레을 벗어나지 못한 채 발버둥 치고 있었다. 

남보다 항상 한 걸음 앞선 승려, 수도자, 현자로 자부해오던 그. ‘나’를 줄이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부처님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 많은 감명을 받지만, 어떤 스승도 자기를 가르쳐서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 삶의 완성 구현은 자기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과감히 수도승 같은 생활을 버리고 강을 건너 감각의 세계에 들어간다.

자아를 버리기 위해 세속의 길에 들어선다. 

사색과 기다림과 단식, 이 세 가지를 주특기로 세속에 적응한다. 아름다운 여자 카밀라를 만나 사랑의 기술도 깨우치고, 돈도 벌고, 명예도 얻고, 도박도 하며 지낸다.  

점점 세속에 찌든 자신의 모습에서 동물적 혐오감과 유치함을 느끼게 되고, 세상의 덫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게 된다. 서서히 잃어버렸던 자기 내면의 소리가 들리게 된다. 다시 강가로 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깨어나 새롭게 세상을 바라본다.

뱃사공 바주데바와 강에 대해 깊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강물은 바다가 되기 위하여 흐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의 목적이 달성되면 새로운 목적이 그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물은 수증기가 되어 하늘에 올라가 비로 변하여, 샘이 되고 시내가 되고 강이 되어 새로운 목표를 향해 흐르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합쳐져 있었다. 일체의 소리, 일체의 목적, 일체의 그리움, 번뇌, 쾌락, 선과 악이 합쳐진 것이 다름 아닌 이 세계였다. 또한 그것은 생성의 강이요, 생명의 음악이었다”

인간의 내면세계도 대립되는 두 개의 가치가 항상 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선과 악, 욕망과 금욕, 삶과 죽음, 동양과 서양, 혼돈과 질서, 이성과 감성, 기쁨과 슬픔…. 인간은 우리 내면의  이 두 세계를 분리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 

두 세계를 단일성의 세계로 통일 시키면서, 결국 두 개의 길은 같은 목표를 향해 갈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기완성의 길이요 자기 구현의 길이라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수많은 어리석음과 시행착오가 오로지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새로 시작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의 삶이 결코 자기 구현이라는 삶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가 사문, 수도자로 살았던 싯다르타가 강을 건너 감각의 세계, 속세의 세계를 살아보고, 

다시 강가로 와서 자기 내면의 두 세계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한층 발전된 자아를 갖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소설이 끝을 맺는다면? 그동안 영화나 소설 등에서 많이 봐왔던 스토리가 되겠다. 수도자가 환속했다가 다시 수도자의 길을 걷는 스토리가 아니겠는가? 헤세가 마지막으로 한번 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건드리는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자식 문제···.

싯다르타는 카밀라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로 인해 다시 번민에 빠진다. 예나 지금이나,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한다지만, 자식 문제를 알아서 할 부모는 세상에 없지 않은가? 천방지축 아들에게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참담한 심정을 갖는다.

이제 서야, 싯다르타는 자신이 아버지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는지를 깨닫는다. 

그 옛날, 부모의 사랑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던 싯다르타, 오직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았던 그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식을 통해 자신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을 가장 아프게 하는 존재인 데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

내 아닌 존재를 나보다 더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사랑의 완성이다.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삶에서, 남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내면의 길을 찾아갈 수 있을까? 내면에서 대립을 이루는 두 세계가 조화를 이루어, 나를 사랑하고 그리고 남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더 나아가 사랑까지 할 수 있는 자기완성의 길을 나아갈 수 있을까?

헤세가 사춘기부터 그토록 찾아다니던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 자기 내면의 길의 목적지는 이러한 사랑의 완성을 위함이 아닐까?

인간은 본질적으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아니 인간만이 아니라 생명을 가지고 있는 모든 존재의 속성이자 숙명이다. 우리는 주어진 자연과 인간 사회의 조건에 끊임없이 도전하여 더 나은 환경을 선택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발전시켜왔다. 

점점 더 발전해 나가는 우리의 모습이 우리 자신에 이르는 길, 우리 내면의 길을 완성시키는 길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것이 사랑의 완성을 이루는 길이었으면 좋겠다. 

쉽게 책을 써준 헤세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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