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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복규 교수의 의료만필(醫療慢筆) 14] 병원의 존재 이유는?
[권복규 교수의 의료만필(醫療慢筆) 14] 병원의 존재 이유는?
  • 의사신문
  • 승인 2023.07.18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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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복규 교수(이화의대, 의학교육학교실)

예전에 스웨덴에서 온 젊은 의사에게 스웨덴 의료의 현실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우리 국민 상당수가 생각하는 이상향 북유럽,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스웨덴 말이다. 병원 응급실은 누가 지키냐고 했더니 의대생, 그리고 인턴과 전공의가 주로 지킨다고 했다. 단순한 시술 등은 학생이 거의 다 한다고 했다. 

놀라서 그럼 사고 안 생기냐고 물었더니 상급자가 함께 있으니 그런 일은 거의 안 생긴다고 했다. 의료사고가 나면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거의 대부분은 그냥 수긍하고 받아들인다고 했다. 전혀 터무니없는, 의사나 의료인의 과오가 확실한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래서 또 한 번 놀랐다.

사실 20세기 초엽까지 병원은 병을 치료받으러 가는 곳이 아니었다. 병원(hospital)이라는 곳은 한마디로 오갈 데 없는 병자, 노숙인에 가까운 환자들을 수용하는 수용시설이었다. 

유럽 주요 도시의 주요 병원들이 대개 성당이나 교회 옆에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중세 이후 성당(교회)이란 걸인과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모여 구걸도 하고 자비를 청하는 그런 곳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요일에 명동성당에 가보면 무료 급식소 한켠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무료 진료소를 열어두었다. 즉 전통적으로 병원이란 돌볼 가족이 없는 사회 최하층 사람들을 위한 구휼과 종교적 구원의 장소였다는 뜻이다.

그럼 이런 병원에서는 누가 일을 했는가? 간호는 수도사나 수녀 등의 종교인들이 했다. 이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종교적/영적 서비스이어서 물론 무료였다. 가끔 독실한 종교인인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의료는? 각 도시가 고용한 공의(public doctor) 등이 가끔 와서 진단과 처방을 했고, 혹은 자원봉사를 하는 의사들이 일부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진료는 의학생과, 학업을 마친 뒤 임상 경험을 더 쌓겠다고 병원에 남은 이들-병원 거주자(resident), 혹은 병원 내 의사(intern, houseboy)의 몫이었다. 이들은 병원에서 먹고 자면서 환자들을 돌봤는데 이들의 명칭이 인턴, 혹은 레지던트가 되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본인이 독립 개업의(independent practitioner)가 되기 전에 임상 지식과 경험을 충분히 쌓아야 할 필요성에서였다.

가족이 있는 환자들은 집으로 의사를 불렀다. 이것이 이른바 왕진이라는 것이다. 수술도 환자의 집에서 했고, 분만도 역시 집에서 했다. 임종 역시 환자의 집에서 맞이했고 필요한 간호는 환자의 가족들이 도맡아서 하였다. 이것이 20세기 초반까지의 풍경이다. 

현대 의학이 발전하면서 많은 새로운 시설과 장비, 그리고 이를 운용할 전문가들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병원이 치료의 중심지로 변신했지만, 자기 돈을 내는 자비 환자와, 병원이 교육 및 수련, 연구 목적으로 입원시킨 자선 환자의 구분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자기 돈을 내고 병원에 입원한 자비 환자는 물론 학생이나 전공의의 손이 닿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처럼 일찌감치 공공의료를 도입하여 병원이 공공시설로 안착한 곳에서는 누가 자신을 돌보든 환자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만의 주치의’의 선택 가능성은 이러한 공공의료 시스템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도 일제시대에는 병원, 특히 의학교 부속병원은 교육과 연구의 중심지였고, 치료의 중심지로 보긴 어려웠다. 경제성장이 되고, 의학기술이 발전하면서 특히 1980년대 이래 경쟁적으로 대학병원들이 병상을 증설하고, 재벌 병원들이 등장하면서 대형 종합병원이 치료의 중심지가 되었고, 전국민 건강보험의 등장은 이를 가속화하였다. 

이 제도가 없었다면 대형 종합병원이 등장했다 해도 누구나 이들을 쉽게 이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포퓰리즘적 정치문화는 그나마 존재했던 의료전달체계를 다 무너뜨렸고 질병의 경중과 무관하게 누구나 아무 때나 대형 종합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 마치 대단한 정치적 업적인 것처럼 선전하기에 이르렀다. 

대형 종합병원은 꼭 필요한 사람만 이용하는 것이 의료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길이며, 또 그러한 병원은 진료뿐 아니라 교육과 수련의 중심지이어야 한다는 원칙은 무너졌다. 전공의나 펠로우에 대한 정당한 교육 절차인 수술이나 진료 참여조차 쉽지 않은 환경에서 의대생에 대한 교육은 더욱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른바 ‘선진적’인 의료 시스템은 아무 나라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외형적으로는 선진국에 가까워졌지만 급속한 성장 과정의 이면에 각종 시스템들은 부실하기 짝이 없고, 그 중에서도 의료시스템이야말로 대표적으로 모든 문제를 다 끌어안고 있다. 모든 이들의 욕망이 가장 격렬하게 분출하고 있지만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기란 ‘근본 없는’ 의료문화 속에서 난망하기 짝이 없다. 모든 이가 평등하게, 아무 때나 최고 전문의의 진료를, 무상으로 받으면서, 실력 있는 미래 세대 의사를 양성할 수 있는 저렴한 시스템, 그러한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 시스템을 만들기 어려운 이유가 오로지 의사의 탐욕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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