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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법인 내세워 병원 개설한 非의료인···대법 "'탈법수단 악용' 증명돼야 처벌 가능"
의료법인 내세워 병원 개설한 非의료인···대법 "'탈법수단 악용' 증명돼야 처벌 가능"
  • 홍미현 기자
  • 승인 2023.07.17 1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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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전원합의체, '의료법 위반 유죄' 원심 파기환송

비(非)의료인이 의료법인을 앞세워 의료기관을 개설·운영했을 때 의료법 위반죄로 처벌하려면 비의료인이 해당 의료기관의 개설·운영에 주도적으로 관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의료법인을 탈법적인 수단으로 악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져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지금까지 비의료인에 의한 의료기관 개설·운영에 대해 이른바 '주도성 법리'에 따라 처벌 여부를 판단해왔는데, 이 법리를 의료법인 명의의 의료기관에 그대로 적용해 비의료인이 주도적으로 재산을 출연했다거나 주도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정만을 근거로 비의료인이 실질적으로 의료기관을 개설·운영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17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사기) 및 의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대법관 8대 5로 의견으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대구고법으로 돌려보냈다.

B의료법인 이사장인 A씨는 의사가 아닌데도 의료법인을 설립한 뒤 요양병원을 개설·운영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의료법은 의사나 치과의사, 한의사,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의료법인 등이 아닌 경우 의료기관 개설을 제한하면서, 이를 위반하면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검찰은 A씨가 이른바 '유령 의료법인'을 내세워 요양병원을 연 뒤 개인 영리를 취득했다고 보고 의료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실질적인 요양병원 개설자를 의료법인이 아닌 A씨 개인으로 본 것이다.

이에 대해 1·2심은 모두 기존 '주도성 법리'를 근거로 A씨의 혐의를 유죄로 판단했다. 법원은 지금까지 비의료인에 의한 의료기관 개설·운영에 대해 '비의료인이 의료기관의 시설·인력의 충원·관리, 개설 신고, 의료업의 시행, 필요한 자금 조달, 운영 성과의 귀속 등을 주도적인 입장에서 처리했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처벌 여부를 판단해왔다.

1·2심 역시 "A씨가 의료법인 설립 허가를 받을 때 일부 재산 출연을 가장했을 뿐만 아니라, A씨가 이사장 지위에서 과다한 급여를 지급받고 배우자 등 임직원들에게도 과다한 급여를 지급하는 등 영리를 목적으로 의료법인을 운영했다"며 의료법인은 형식에 불과할 뿐, A씨가 의료기관의 실질적인 개설자라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의료법상 비의료인이 의료법인 명의 의료기관의 개설·운영 등에 필요한 자금 전부나 대부분을 의료법인에 출연하는 것이 허용되고, 의료법인의 이사 등 지위에서 의료기관의 개설·운영에 관한 의사결정·업무집행에 참여하거나 주도하는 것도 허용된다"고 밝혔다.

이어 "기존 주도성 법리를 의료법인 명의 의료기관의 개설 자격 위반 판단에 그대로 적용할 경우 비의료인에게 허용되는 행위와 허용되지 않는 행위의 구별이 불명확해져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대법원은 "비의료인이 개설 자격을 위반해 의료법인 명의의 의료기관을 실질적으로 개설·운영했다고 판단하려면, 비의료인이 의료법인 명의의 의료기관 개설·운영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는 점을 기본으로 '비의료인이 외형상 형태만을 갖추고 있는 의료법인을 탈법적인 수단으로 악용해 적법한 의료기관 개설·운영으로 가장했다'는 사정이 인정돼야 한다"며 새로운 판단 기준을 제시했다.

즉, △비의료인이 실질적으로 재산 출연이 이뤄지지 않아 실체가 인정되지 않는 의료법인을 의료기관 개설·운영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했다는 사정이나 △의료법인의 재산을 부당하게 유출해 의료법인의 공공성·비영리성을 일탈했다는 사정이 인정돼야 의료법 위반으로 처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대법원은 "의료법인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의료기관을 개설한 후 시·도지사의 지속적인 관리·감독을 받으면서 상당한 기간 동안 의료기관을 정상적으로 운영해 왔다면, 그 설립 과정에 다소 미비점이 있었다거나 운영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의료법인의 재산을 유출하는 횡령·배임 등 위법 행위가 존재했다는 사정만으로는 의료법인이 의료기관 개설·운영을 위한 탈법적인 수단으로 악용됐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A씨가 의료기관 개설·운영과 관련된 사항을 주도적인 입장에서 처리했다는 사실은 인정되지만, 실체를 갖추지 못한 의료법인을 악용했다거나 의료법인의 재산을 부당하게 유출해 공공성·비영리성을 일탈했다고 인정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심리·판단이 필요하다"며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반면 박정화·민유숙·김선수·이흥구·오경미 대법관 등 5명은 "의료법인 명의로 개설된 의료기관을 실질적으로 비의료인이 개설·운영했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비의료인 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로 의료법인의 공공성·비영리성이 형해화돼 의료법인에 대해 예외적으로 의료기관 개설 자격을 부여하는 의료법의 입법취지가 몰각됐다고 볼 정도에 이르렀는지를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반대 의견을 냈다.

이들은 다수 의견에 대해 "의료법인 명의의 의료기관의 경우 개설 자격 위반의 인정 범위가 지나치게 축소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영리 목적 의료기관의 개설을 억지해 의료의 적정을 기하고 국민의 건강을 보호·증진하고자 하는 의료법의 입법목적을 해치고 나아가 국민건강보험 재정의 건전성을 위협할 우려가 있다"고 비판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에 대해 "의료법인 명의 의료기관 개설·운영과 관련해 수범자인 비의료인의 법적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는 판단 기준을 제시했다"며 "비의료인은 예측 가능한 판단 기준을 기초로 의료법인 명의의 의료기관 개설·운영에 관여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의료기관의 지역적 편중 해소 및 의료취약지역 주민에 대한 수준 높은 의료서비스 제공을 위해 도입된 의료법인 제도가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비의료인이 의료법인 명의의 의료기관의 운영 수익을 부당하게 유출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취지가 아니다"라며 "재산이 출연되지 않아 의료기관을 개설·운영할 수 없는 의료법인을 의료기관 개설을 위해 악용하거나 의료법인의 공공성, 비영리성을 일탈하는 행위는 철저히 금지되고, 그와 같은 행위를 한 경우 개설자격을 위반해 의료법인 명의 의료기관을 개설·운영한 것으로 평가되어 처벌 대상이 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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