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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주는 고통과 기쁨
책이 주는 고통과 기쁨
  • 홍영준(원자력병원 진단검사의학과)
  • 승인 2023.07.04 0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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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85)

1975년 옥스퍼드 대학의 분자생물학자 에드윈 써던(Edwin Southern)은  DNA 서열을 알아내고 돌연변이를 검출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개발했다.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따 ‘써던 블롯(Southern Blot)’이란 이름을 붙였다. 써던 블롯은 이후 노던 블롯, 웨스턴 블롯, 이스턴 블롯 같은 또 다른 분석법 개발에 있어서, 기술적인 부분은 물론 작명(作名)에까지 기발한 영감을 줌으로써 뭇 실험실의 ‘동서남북’을 신기술로 꽉 채우는데 기여했다.

요즘은 PCR이나 NGS 같은 첨단 기법에 밀려났지만 난 가끔 과거 레지던트 때 병원 검사실에서 열심히 돌리던 써던 블롯이 불쑥 생각날 때가 있다. DNA 조각을 머금은 전기영동 젤을 니트로셀룰로즈 막으로 덮은 다음, 일종의 모세관 현상으로 DNA를 막 쪽에 빨아올리기 위해 그 위에 크리넥스나 종이 타월을 잔뜩 올리고서 다시 무거운 책 따위로 꾹 눌러주던 일이 생생하다. 

서론이 길었지만, 써던 블롯의 이 장면이 기억 속에 약간 서글프게 각인된 것은 당시 중량(weight)을 위해 올려놓던 두꺼운 책들이 예외 없이 철 지난 의대 교과서들이었기 때문이다. 첨단 지식을 담은 책들의 숙명이랄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빛나던 지식들은 금세 노후화되고 교과서들은 존재의 의미를 빠르게 잃고 만다. 그나마 써던 블롯을 통해 일말의 재활용 기회를 얻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냄비 받침으로 알뜰히 쓰이는 하드커버 석박사 학위논문 정도의 마지막 유용성은 인정받은 셈이니까.

책을 열심히 읽는 사람을 ‘독서가(讀書家)’라 하는 반면, 그저 열심히 사 모으기만 하는 사람은 ‘장서가(藏書家)’라 일컫는다. 난 그 중간쯤 되니 어쩌면 ‘장독서가’라 불릴 법하다. 왠지 된장, 고추장 담아두고 오래오래 퍼먹는 ‘장독’과 일맥상통인 것 같다. 어떤 그룹에 속하건 공통점은 책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책을 버리는 건 이들에게 상당한 고통이다. 그리고 도서관을 운영하는 개인이 아니라면 물리적 공간의 한계로 인해 책과 쓰라리게 이별하는 시간은 반드시 오기 마련이다.

책을 버리기 전, 전조증상처럼 겪게 되는 또 다른 고통은 서가 정리를 할 때 찾아온다. ‘픽션과 논픽션을 구분해라’, ‘사이즈가 유사한 것끼리 한 군데로 모아라’, ‘표지 색이 비슷한 것들끼리 무리 지어 놓으면 책장이 예쁘다’, ‘한번 꺼낸 책을 계속 왼쪽에 꽂으면 활용 빈도를 알 수 있다’, 등등 책 정리에 관한 조언은 인터넷에 차고도 넘치지만 결국 공간 부족으로 방이나 거실 여기저기에 드러눕는 책들이 속출하다가 마침내 정리 자체가 불가능한 경지에 이른다.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리면 이제 책을 버릴 방법을 고민하는 수밖에.

내가 그렇게 하듯이, 아마도 교과서나 참고서 따위가 최초의 구조조정 희생양이 되는 게 보편적인 것 같다. 비싼 돈 주고 산 의대 교과서를 버릴 때, 특히 그 교과서들이 밑줄 쳐졌거나 손때 묻은 곳 하나 없이 거의 새 책처럼 반짝거릴 때, 나는 속 쓰림을 동반한 복합부위 통증을 느낀다. 무겁고 두꺼워서 물 붓고 즉석 라면 익힐 때 덮개로 쓰기도 나쁘고... 추억의 써던 블롯이 여전히 사용되면 검사실에 기증이라도 할 텐데...

아무튼 책장이 가득 차서 어쩔 수 없이 일 순위로 버리게 되는 책이, 한때 최신지식을 자랑하던 교과서 종류의 학술서적들이란 게 뭔가 깨달음을 준다. 당대의 쓸모야 아주 많았겠지만, 콘텐츠가 시대를 관통하는 진리나 지혜가 아니라면 얼핏 화려해 보이는 지식의 생명력은 매우 짧다는 것. 어쩌면 소박한 시집이나 재미있는 단편소설들이 마치 늘 먹는 집밥처럼 물리지 않고 읽히다가, 마침내 쉽게 끊기 어려운 천륜 같은 애정으로 독자와 연결되지 않겠는가.

책이 사태(沙汰)가 나서 버리게 되는 순간이 고통이라면 반대로 책을 들여놓고 함께 하는 시간은 적지 않은 기쁨이다. 이 기분을 움베르토 에코는 이렇게 묘사한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원래 이 문장은 15세기 수도사 ‘토마스 아 켐피스’가 했다는 말로, 에코의 소설 데뷔작 <장미의 이름> 서문에 인용되면서 일약 유명해졌다. 이탈리아에서 출판된 <장미의 이름>은 영문번역을 거쳐 다시 한국어로 중역(重譯)되었고 이 작업을 담당한 사람이 이윤기 선생이다. 한자어를 무수히 사용함으로써 엄숙하고 현학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던 분답게 이 구절도 역시 고풍스러운 번역이다. 그런데 여기서 ‘구석방’의 원문은 ‘angulo’, 영어로 하면 ‘corner’니까, 안식을 누리려면 꼭 ‘방’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저 모퉁이 한 구석 정도라도 가능할 듯하다. 손에 잡히는 곳에 책만 좀 있다면 말이다.

옛날 인턴 시절 나는 움베르토 에코의 또 다른 소설 <푸코의 진자>를 당직실 침대 모퉁이에 놓아두곤 했다. 거의 막노동과 유사한 육체 활동으로 피폐해진 컨디션을 신속히 회복하려면 다만 몇 시간이라도 잠을 푹 자는 게 최선이었다. 분량이 방대하고 내용이 난해한 <푸코의 진자>를 펼치면 몇 페이지 못 넘겨 꿀 같은 잠이 쏟아졌다. 그렇게 병원 곳곳에서 살벌한 일거리만 마주치던 인턴에게 책이 있는 당직실 침대보다 더 나은 곳은 없었다.

대가의 작품을 살짝 모독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가까이 두면서 만지고, 넘기고, 구기고, 낙서하고, 또 가끔은 수면 유도 용도로도 쓰고, 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책의 내용 또한 서서히 조금씩 머릿속에 따라 들어온다. 공감각과 다용도가 합쳐질 때 책이 주는 기쁨은 배가된다. 일찍이 움베르토 에코는 루브르 박물관 2층에서 자신의 책 <장미의 이름>과 아마존의 전자책 ‘킨들’을 냅다 던지는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다. 전자책은 박살났지만 종이책은 멀쩡하다는 걸 사람들에게 유쾌하게 보여준 그가 살아있다면, 자기 소설 읽다가 좀 졸았다고 탓하진 않을 게 분명하다. 적어도 책의 기쁨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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