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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복규 교수의 의료만필(醫療慢筆) 13] 프랙티스(practice)라는 말
[권복규 교수의 의료만필(醫療慢筆) 13] 프랙티스(practice)라는 말
  • 의사신문
  • 승인 2023.06.27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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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복규 교수(이화의대, 의학교육학교실)

프랙티스라는 단어만큼 번역이 어려운 단어도 별로 없다. 의료의 맥락에서 프랙티스가 쓰인다면 이는 진료? 치료? 의료의 실천? 무어라 옮겨야 할까? 그런데 프랙티스와 대비를 이루는 단어는 아마도 테오리아(theoria), 즉 이론일 것이다. ‘이론과 실천’, 86세대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단어의 묶음이다. 가끔 여기에 “모든 이론은 회색빛이며…” 운운이 덧붙여지면서 말이다.

전통 시대에는 프랙티스에 해당하는 말이 없었으니 그 개념도 없다. 전통시대에 한자어로 표시하면 프랙티스는 아마도 동사를 의미할 때는 행(行)이, 명사를 의미할 때는 술(術)이 될 것이다. 유학은 텍스트(사서삼경)를 읽고 외우는 ‘학문’만을 너무 숭상한 나머지 인간의 다른 활동들은 모두 술(術)로 폄훼하였다. 

의술은 물론이고 산술, 역술, 양생술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전통 시대에 의사는 그저 의술을 행(行)하는 술사(術士)였지 고상한 선비와는 거리가 멀었다. 선비는 모름지기 성현의 말씀을 공부해서 치국, 평천하를 하는 자였으며, 의술 같은 천한 일에는 종사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끔 유의(儒醫)라 하여 유학자들이 의술을 행(行)하기도 하였지만, 이들은 직업으로서 그 일에 종사한 것이 아니라 백성 구제라는 일종의 사회봉사로서 하였던 것 뿐이다. 직업의 개념이 없고 신분의 개념만 있었던 우리나라 전통 시대의 모습은 손으로 하는 일과 머리로 하는 일 사이에 손과 머리를 다 써야 하는 일(practice)을 두어 이를 중요하게 보았던 서양 문명과는 차이가 있다.

필자는 의사의 자격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기초의학 교수와 마찬가지로 프랙티스를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환자를 본 건 이십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프랙티스를 하는 사람(practitioner)이 아니라는 뜻이다. 영어로 프랙티쇼너(practitioner)는 환자를 보는 의사, 그 중에서도 특히 개업의를 의미한다. 그럼 의대 교수는? 원래 의대 임상 전임교수는 프랙티쇼너로 보지 않는데 그의 보수는 원칙적으로 연구를 하고 학생을 교육하는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지 환자를 진료하는 데 대한 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환자를 보는 것은 자기 전문 분야에서 개업의에게 자문을 할 때이다. 이러한 의대 교수는 영어로 컨설턴트(Consultant)라고 부른다. 

이런 식으로라면 1차-2차-3차 의료의 구분도 자연스러워진다. 물론 미국에서도 소위 관리의료의 등장 이후 의대 교수의 진료 활동과 수익이 중요해지면서 이런 구분도 많이 희미해졌지만 애초의 원칙이 그렇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에는 개방형 병원에 자기 환자를 입원시킬 수 있는 특권(hospital privilege)을 가진 개업의인 ‘비전임’ 교수들도 있다. 이 ‘교수’들은 자기 환자로부터 진료비를 받고, 병원이나 의과대학으로부터 보수를 받지 않는다. 

한때 프랙티쇼너를 개업의로 번역할지, 개원의로 번역할지 고민이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개업의(開業醫)는 어쩔 수없이 개원의(開院醫)가 된다. 개방형 병원처럼 내 환자를 입원시킬 병원이 없으니 시설과 장비를 다 갖춘, 심지어 수술실과 입원실까지 갖춘 나만의 시설을 만들어야 하는 것, 즉 병원을 만들어야 하는 것(開院)이 우리나라 개업의의 운명이다. 이러니 개원에 큰 돈이 들고, 원래 재산이 없었다면 융자를 얻어 빚을 감당해야 하니 결국에는 일종의 소기업 경영자처럼 된다. 

작은 오피스 하나 얻어 비서 한명 두고(때로는 다른 의사와 공유하면서) 외래를 보다가 필요하면 계약을 맺은 검사실에 보내 검사를 시키거나, 병원에 입원시키는 일은 우리나라에서는 바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개업하다’가 ‘개원하다’로 되고 개업의와 개원의가 동일한 의미를 갖게 된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모든 정부가 이를 수수방관하였는데, 의사가 전적으로 자기 책임 하에 자기 돈(혹은 빚)으로 의료 인프라를 까는 것은 정부 입장에서는 환영하면 환영했지 말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료 인프라의 설치와 운영은 모두 의사 개개인에게 맡겨 두는 한편으로 가격만 강력하게 통제하는 것이 세계 최고 수준의 저비용 고효율을 달성한 K-의료의 이면이다. 

우리는 서양의학을 들여와 쓰고 있지만 그 용(用)만을 취했을 뿐 그 체(體)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는 개념의 혼란으로 이어졌고, 개념의 혼란은 제도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극복해본 적이 없는 전통 시대의 의식과 개념들은 여전히 온존하면서 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의학이 과연 사람을 치료하는 술(術)에만 국한될 수 있는가? 

오히려 근대의학이란 근대라는 제도와 사상과 문화의 산물이며 구석구석까지 근대의 이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우리가 무슨 제도를 이렇게 저렇게 바꾸어도 늘 문제가 지속되는 이유, 그것은 이 나라에서 근대의학의 형태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고민 없이 ‘선진국’의 몇몇 제도나 행태를 들여와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식의 태도는 귤이 위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는 오류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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