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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단테 안단테
안단테 안단테
  • 홍영준(원자력병원 진단검사의학과)
  • 승인 2023.06.20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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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84)

병원장 소임을 맡았던 4년 반의 기간은 오롯이 코로나와 함께 한 나날들이었다. 암 환자들을 위협하는 전염병으로 인해 잠을 못 이룰 만큼 근심에 휩싸인 적도 있었고, 기진맥진한 우리 의료진들 모습에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마침내 그 재난의 종착역에 이르러 모두의 일상이 서서히 정상으로 회복되는 걸 보면서 집행부에서 내려오게 된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그런데 한동안 떠나 있었던 진단검사의학과로 돌아오니 많은 게 낯설고 서툴다. 복귀 첫날 검사실과 판독실에서 내내 신입 인턴 선생처럼 덤벙거리다 퇴근 무렵 직원주차장에서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주차타워에서 내 차를 빼 나오다가 출구 바로 옆 커브 길에 제법 높은 연석이 있는 걸 모르고 그 위를 급히 지나쳤던 것이다. 몇 년 전엔 아주 익숙한 길이요 구조물들이었는데 그 기억을 끌어오기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나 보다.
  
한쪽으로 크게 출렁거린 차는 왼쪽 뒷바퀴 옆면에 칼로 찢은 듯한 상처를 입었고 그쪽 타이어의 공기압은 순식간에 제로가 되었다. 망연자실하다가 어렵사리 긴급출동 서비스를 불러 스페어타이어로 갈아 끼운 다음 조심조심 서비스센터로 향했다. 그때 문득 머릿속에 묘한 생각이 들었다. 이게, 뭔가 예사롭지 않은, 상징적 사건 같았기 때문이다.
  
‘타이어를 바꿔 끼운다? 이거 영어로 하면 re-tire 아닌가. 설마 벌써 은퇴를 고민해야 한다는 뜻인가?’ 살짝 우울해지려던 순간, 단어의 본래 어원은 아니지만, ‘retire’ 곧 ‘타이어 교체’란 말은, 일을 마감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거 아니겠느냐며 정년퇴임 때 역설하시던 여러 선배님들 얼굴이 떠올랐다. 말씀대로 정년 이후 보람찬 제2의 인생을 늠름하게 살아가시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신 분들. 그제야 찜찜함이 물러가고 ‘이참에 인생의 나침반과 속도계를 재점검해봐야지’ 하는 의욕이 솟았다.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가 된 후 40년 이상 권좌에 앉아 제국의 기틀을 다진 아우구스투스는 평생의 좌우명이 ‘천천히 서둘러라(Festina lente)’였다. 모순이지만 왠지 멋지게 들리는(라틴어의 미덕이다) 이 말의 뜻이 전부터 난 몹시 궁금했다.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어떤 일을 숙고할 때는 신중하게, 그리고 마침내 실행에 나설 때는 신속하게’라는 것 같았다. 느린 것과 빠른 것이 동시에 일어날 수는 없기에, 상황에 따라, 또 사안의 경중에 따라 그 속도를 달리하라는 의미로 이해되었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이야기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출판사를 차린 알두스 마누티우스는 최초로 대량 인쇄를 통해 저렴한 문고판 서적들을 다수 찍어낸 혁신가였다. 배의 닻을 돌고래(꼭 메기처럼 생겼다)가 감싸고 있는 모양의 그 출판사 로고가 매우 유명하다. ‘천천히(lente)’를 광풍 속에서도 배를 단단히 고정하는 ‘닻’으로, ‘서둘러라(festina)’는 요리조리 날쌔게 물살을 가르는 ‘돌고래’로 형상화한 것이다. 라틴어라는 것만으로도 제법 유식해 보이는데 거기에 멋진 이미지까지 더해지니, ‘Festina lente’는 ‘Amor fati’나 ‘Memento mori’ 못지않게 오늘날에도 많은 사랑을 받는 라틴어 문장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걸 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나.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어떤 작가는 ‘인생은 서두르되, 하루는 천천히 살기’라고, 자신만의 독특한 하이브리드식 적용을 이야기하면서 하루의 계획보다 월간계획에 집중하는 것을 액션플랜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자료를 찾아보면 ‘서두르되 전후좌우를 잘 따져가면서 서둘라’거나 ‘서둘러도 방향과 목적의식을 잃지 말라’는 식으로 두 가지 상반된 단어 중에 ‘서두름’에 비중을 두는 해석이 단연 많다. 그렇다면 결국 ‘천천히’란 부사는 매사 빨리빨리 처리하길 원하는 속내를 감추기 위한 의례적인 포장 아니었을까. 
  
병원장 재직 중에 나도 ‘천천히 서둘러라’는 말을 의사결정에 참고하고자 애썼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모순어법은 우아한 철학의 영역이지 생존경쟁이 치열한 경영 현장에는 잘 안 맞는 것 같았다. 어쩌다 남들에게 잘난 척하며 ‘천천히 서둘러라’를 점잖게 언급했던 때의 솔직한 심정은 ‘서둘러라, 단 사고만 치지 말아라’에 가까웠음을 고백한다.
  
일상에서 내가 그 경구를 유일하게 적용했던 실제 상황은 운전하면서 차로를 바꿀 때였다. 깜빡이 켜고 진입할 때는 일단 ‘천천히’, 그리고 차선을 넘어가기 시작하면 ‘서둘러라’. 로마 황제의 엄숙한 좌우명을 그렇게 경박하게 적용하다 보니 주차장에서 바퀴가 터지는 사고를 당하지 않았나 싶다. 습관처럼, 천천히 운전대를 꺾자마자 가속페달을 꾹 밟았으니까.
  
‘Festina lente’가 해석의 모호함과 실제 적용의 난망함으로 구두선(口頭禪)에 그치기에, 나는 그 대신에 ‘Andante, andante’를 좌우명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느리게’란 의미의 음악용어 ‘안단테(andante)’는 어원까지 고려하면 ‘천천히 걷는 정도의 빠르기’란 뜻이다. 굳이 두 차례 연거푸 쓰는 이유는 스웨덴의 4인조 혼성그룹 ‘ABBA’의 노래 가운데 ‘안단테 안단테’란 제목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스러운 멜로디가 귀에 착 붙는 ‘안단테 안단테’는 <맘마미아2>에서 젊은 도나가 카페에 취직하기 위해 오디션용으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원곡 가사를 살펴보면 연인에게 너무 서둘지 말고 천천히 다가오라 요청하는 애정 가득한 속삭임이다. 영상과 멜로디로 기억되니 일상에 적용하기가 수월하고 즐겁다.
  
밥을 너무 빨리 먹는다고 지적받을 때 이젠 ‘안단테 안단테’를 생각한다. 덤벙거리다 실수하기 일쑤인 탁구 시합 때도 ‘안단테 안단테’를 떠올린다. 막히는 길 운전할 때, 지루한 회의할 때도 ‘안단테 안단테’의 효과를 기대한다. 무엇보다 그동안 걸핏하면 짜증을 돋우고 분노를 유발하는 온갖 사회적 이슈를 접할 때, 혹은 그런 사람을 만날 때 ‘안단테 안단테’의 가사를 읊조린다. 저녁 먹고 여유 있게 동네를 산책하듯 천천히 천천히 다가감으로써, 아바의 노래처럼 그 대상이 나의 음악이 되고 노래가 되는 마법을 체험하리라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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