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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복규 교수의 의료만필(醫療慢筆) 12] 손 글씨, 그리고 청진과 타진
[권복규 교수의 의료만필(醫療慢筆) 12] 손 글씨, 그리고 청진과 타진
  • 의사신문
  • 승인 2023.05.31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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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복규 교수(이화의대, 의학교육학교실)

요즘 어린 학생들이 키보드나 핸드폰에 너무 길들여진 나머지 손 글씨를 너무 못 쓴다는 기사를 보았다. 시험 답안을 채점하는 교사들도 못 알아볼 지경이어서 이게 무슨 글자가 맞는지 교사끼리 논의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나도 손 글씨를 쓴 적은 한참 되었다. 동사무소 같은 곳에서 간단한 서류를 채우는 일 말고는 손 글씨를 쓸 일이 아예 없다. 그러니 자라나는 어린 학생들은 더할 것이다. 이들이 평생 손 글씨를 써 볼 일이 있을까? 

음성인식기술이 더 발전하면 아예 키보드를 쓸 일도 없어질지도 모른다. 입으로 불러주고 AI가 교정해 주면 글씨를 ‘쓰거나’, ‘찍는’ 일도 사라질지도 모른다.

붓글씨가 예전에는 일상에 필요한 기술이었지만 지금은 예술이나 도락의 영역이 된 것처럼, 드로잉 역시 꼭 필요한 기술에서 예술의 영역이 되었다. 카메라가 없던 시절, 과학자의 재능 중 하나는 드로잉을 하는 것이었다. 동물이나 식물, 혹은 현미경으로 관찰한 세포 등은 손으로 그림을 그려 묘사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의 과학자, 그리고 의사들은 그래서 그림 그리는 재능이 뛰어났다. 주의 깊은 관찰에 이어 섬세한 묘사를 할 수 있는 것이 과학과 의학의 기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메라가 나온 이후에는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이처럼 새로운 기술은 예전의 재능을 의미 없게 만든다. 

요즘 의대생들은 청진법이나 타진법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한때 의사의 상징은 머리에 쓰는 헤드미러, 그리고 청진기였다. 그런데 내시경 카메라가 발달한 지금은 헤드미러를 쓰는 이비인후과 의사도 본 적이 오래 되었다. CT, MRI, 초음파의 위력 앞에서 청진은 빛이 바랜지 오래 되었다. 영상진단기기가 없던 시절, 청진이나 타진은 몸 안 장기의 상태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지금이야 고해상도의 MRI로 폐 사진을 찍어보면 바로 알 수 있지만, 과거에는 흐릿한 엑스선 가슴 사진을 보고 추측하든지, 청진을 해서 기관지가 얼마나 막혔는지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심장도 지금은 초음파로 실시간 관찰이 가능하지만, 예전에는 역시 청진을 해서 희미한 소리를 들어가며 판막의 상태 등을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청진은 프랑스 의사 라엔넥(Rene Laennec, 1781-1926)이 창시했고, 타진은 오스트리아 의사 아우엔브루거(Leopold Auenbrugger, 1722-1809)가 창시했다. 이 방법은 모두 질병이 체액의 불균형이나 이상의 결과라는 고대의 질병관에서 벗어나 특정 부위나 장기의 이상이라는 근대적 질병관으로 넘어가는 시대에 창시됐다. 

즉 폐나 심장의 소리를 들어본다든지, 복수가 차 있는지 배를 두드려본다든지 하여 해당 부위의 이상을 알아내면 그것이 곧 환자의 다른 증상과 연결된다는 근대 질병관과 병태생리학, 병인학의 결과였던 것이고, 또 이와 같은 진단 방법이 그와 같은 병태생리학이나 병인학의 확산을 촉진하기도 했다. 

청진기가 의사의 상징이 되었던 것은 그 때문인데, 이전 중세에 의사의 상징은 소변을 담는 병인 뇨병(尿甁)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당시에는 체액의 이상을 보는 방법으로 소변을 관찰하는 것, 심지어 소변을 맛보는 것이 권장되기도 했던 것이다. 

세월이 지나고 지금은 청진도 타진도 과거의 기술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CT나 MRI와 같은 현대적 영상진단도구들도 이제는 AI의 등장으로 인해 인간의 해석이 필요하지 않은 단계에 이르기도 하였다. 최근의 AI 솔루션을 활용하면 일부 진단 영역에서는 AI의 진단 결과가 인간 전문의의 정확도를 능가한다고 한다. 심지어 인간은 피로를 느끼고 쉬어야 하지만 이 AI들은 쉬지도 피로를 느끼지도 않으니 더욱 무섭다. 이런 식이라면 얼마 되지 않아 진단도 모두 AI가 하고, 인간 의사는 그 결과를 확인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을까?

의학이 점점 거대한 헬스케어 산업의 일부가 되면서 의사의 자존과 자율성의 영역도 점점 더 축소되는 느낌이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이 거대한 산업의 전모를 알 수가 없으며, 아주 작은 일부 영역에서 자기만의 일을 할 뿐이다. 청진기 하나로 환자의 상태를 꼼꼼히 진찰하며, 보고, 만지고, 두드리고, 느끼면서 환자와 교감했던 옛 스승들의 모습이 때로 그리워지는 것은 어쩌면 이 시대에 학생들이 손 글씨를 못 쓴다고 타박하는 것만큼이나 시대착오적인 일일까? 이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지 않으려면 더욱 많은 노력과 지혜가 우리에게 요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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