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20:55 (금)
[권복규 교수의 의료만필(醫療慢筆) 11] 응급 환자의 진료 거부
[권복규 교수의 의료만필(醫療慢筆) 11] 응급 환자의 진료 거부
  • 의사신문
  • 승인 2023.04.25 09: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복규 교수(이화의대, 의학교육학교실)

2023년 4월 19일, 건물에서 추락하여 뇌출혈이 생긴 십대 여학생이 병원을 찾아 전전하다 숨졌다. 119 구급대는 십여 곳 병원에 연락을 취했으나 병원들은 “병상이 없다”, “전문의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환자 받기를 거부하였고 환자는 결국 사망했다. 언론은 이 사건을 크게 다루었고, 역시 경찰은 이 병원에 대한 수사에 들어갔다. 

검색을 해 보면 이 땅에서 진료거부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57년부터 대학병원에서 “보증금이 없다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당하여 사망한” 환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도 당시의 보건사회부는 “형법을 적용하여 모조리 고발하겠다”고 하였다. 1964년에도 ‘수술 중이라는 이유로 응급환자를 거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병원 원장이 고발되는 일이 있었다. 1972년에도 화상 환아와 산모 등을 진료 거부 하였다고 국립의료원과 주요 대학병원 근무자를 포함한 12명의 의사가 구속, 또는 불구속 입건되는 일이 있었다. 물론 당시에도 의료계는 국공립병원에서도 의사가 입퇴원 결정 권한을 갖지 못하는데 형사 책임까지 묻는 건 지나치다고 크게 반발하였다.

이 일이 오십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럼 그동안 대한민국 의료계에는 어떤 발전이 있었던 가? 물론 진단과 치료는 놀랍게 발전하여 이제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우수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진료를 거부당하여’ 환자가 사망했고, 그래서 의사를 처벌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여전히 나오는 것은 왜일까?

1972년 8월, 서울에 사는 세 살 먹은 정 모 군이 끓는 물에 화상을 입어 국립의료원 등 5개 병의원을 찾았으나 “입원실이 없다”, “진료시설이 미비하다”는 등의 이유로 치료를 거부당하였고, 이틀이 지나 성바오로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곧 숨졌다. 이에 대해 동요작가 윤석중 씨는 “죽음을 앞에 둔 급한 환자를 보고도 치료를 거부하는 의사들의 행위는 곧 살인”이라고 주장하며 “돈에 밝은 인술은 우리 사회에서 필요가 없다”고도 하였다(경향신문, 1972.8.11. 기사). 그 뒤로도 이와 비슷한 일은 2023년 4월 19일의 저 사건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계속 일어났다. 국가는 담당 의사와 병원을 처벌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1972년의 저 사건에 주목하는 이유는 피해자 정 모 군이 내 또래라는 점도 있지만(살아 있었으면 지금 내 나이쯤 되었을 것이다) 이 사안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이다. 저 당시 언론은 이 사안에 대한 의견을 ‘동요작가 윤석중 씨’에게 물었다. 윤석중 선생님, 물론 유명한 ‘반달’의 작사자고, 훌륭한 아동문학가이시지만, 과연 의료에 대해 무엇을 알고 계셨을까? 그 다음 인터뷰한 이는 당시에 국회의원을 하던 ‘모윤숙 여사’였다. 

모 여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의사는 직업적인 의식을 초월해서 인간의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병실이 없다면 병원 복도라도 좋지 않은가”. 모윤숙 여사는 주지하듯 당대 최고의 여성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국회의원’이라는 위치에 있다는 분의 해결책이 “병원 복도에라도 환자를 눕혀라”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가 나라가 못살고 의료시스템이 형편없었던 오십년 전의 에피소드에 불과할까? 이런 일이 일어나면 세상은 의사들을 비난하고, 심지어 ‘살인자’의 딱지를 붙이며, 당국은 ‘엄벌’과 ‘엄단’의 채찍을 휘두른다. 오십년 전에도 그러했다. 그래서 딱히 나아진 것이 무엇이 있는가?

세상은 아동문학가나 문학가, 인문 지식인들의 바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모든 응급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응급의료시스템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과거에는 그러한 환자 중 절반을 구하지 못했는데, 시스템의 개선을 통해서 그 못 구했던 절반의 절반은 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정도, 나날이 조금씩 개선되어 가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한 시스템 개선에는 비용(cost)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 비용은 어디서 나오는가? 국민건강보험체계 하에서는 국가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환자를 병원 복도에 눕혀 놓는다고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1972년 당시에도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들은 이를 알고 있었다. 예컨대 당시 조선일보의 사설은 이렇게 쓰고 있다. “만약 구급진료를 거부하는 의사가 있다면 그런 의사는 의료윤리를 몰각하고 의도를 일탈한 의사로서 법적, 도의적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고 보사부는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구급 진료문제가 이로써 해결된다고 우리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로써 생길 병원의 재무구조에 대한 압박과 그것의 누적이 몰고 올 병원의 수지불균형과 심지어 폐문 위기 등에 대한 대책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의 모든 병원은 다른 기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과 돈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고, 이론상 수지 밸런스의 파괴는 그 존립을 위협하는 절대적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다(조선일보. 1972.8.19.사설)”. 

이론적으로 모든 응급환자를 적시에 치료하기 위해서는 의료자원과 의료인의 수를 대폭 늘이면 된다. 의사 정원을 계속 늘리라는 요구도 그 선상에 있다. 그런데 1972년에는 그것이 개별 의료기관의 존폐 문제였지만, 지금은 국가 건강보험의 보장성 문제가 걸려 있다. 수지 불균형과 폐지의 위험은 지금은 그 스케일이 다르다. 의료도 다른 기업과 마찬가지로 ‘사람과 돈에 의해’ 움직인다. 물론 어린이는 그러한 사실을 알지도, 납득하지도 못 하겠지만 말이다.  

50여 년 간 이러한 일이 계속 되풀이되었던 이유,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되풀이될 것 같은 이유는 우리가 이러한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은 어린이의 특징이다. 보고 싶지 않은 현실도 보아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