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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복규 교수의 의료만필(醫療慢筆) 10] 의사-과학자라고?
[권복규 교수의 의료만필(醫療慢筆) 10] 의사-과학자라고?
  • 의사신문
  • 승인 2023.04.24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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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복규 교수(이화의대, 의학교육학교실)

최근 들어 의사-과학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면서 적지 않은 의과대학들도 이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의학전문대학원 제도가 도입하면서 이 프로그램도 여러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운용된 역사가 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의전원 제도와 함께 문을 닫았고 그 실적에 대한 정확한 평가도 나온 적이 없다. 결과적으로 한번 시도했다가 이미 실패로 돌아간 이 제도에 대한 관심이 왜 다시 높아지는 것일까? 한국 사회의 여론 주도층은 대학 입시에서 최상층을 ‘싹쓸이 하는’ 의과대학이, 혹은 그 졸업생이 이제는 좋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뿐 아니라 바이오헬스 산업이 선도하는 미래 먹을거리를 창출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의사-과학자 양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한다. 

사실 한국의 의과대학 교수는 거의 다 의사-과학자이다. 학술학위(의학박사)가 있는 MD-PhD란 뜻이다. 우리나라의 고등교육법상 박사학위가 없으면 실제로 대학교수로 임용 자체가 매우 어렵다. 그러니 얼마 되지 않는 기초의학교수는 그렇다 치더라도 임상 교수들도 레지던트 프로그램에 덧붙여 대학교수를 꿈꾼다면 대학원에서 이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해야 했다. 예전에는 개원의들도 ‘의학박사’를 명패에 붙여놓는 것이 환자 유치에 좀 도움이 될까 해서 학위를 받은 적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학위에 그럴 만한 매력도 사라져서 요즘은 의과대학 대학원 신입생 숫자도 많이 줄었다. 대체 이 ‘의학박사’와 ‘MD-PhD’는 무엇이 다르다는 것일까?

미국의 MD-PhD 프로그램은 1950년대 후반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지만 활성화된 것은 1964년 국립보건원(NIH)가 의사과학자양성프로그램(Medical Scientist Training Program, MSTP)를 만들면서이다. 이 프로그램은 국가 예산의 지원을 받아 등록생들에게는 의과대학 등록금은 물론, 생활비와 학술 활동에 필요한 여비까지를 지원하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미국 의과대학의 비싼 등록금을 떠올려 본다면 왜 매우 우수한 학생들이 이 프로그램에 지원하였는지를 짐작 가능하다. 이는 소수를 선발하는 엘리트 프로그램이었다. 왜 국가가 이러한 파격적인 지원을 했냐 하면 1957년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다른 과학기술은 물론 의생명과학 분야에서도 소련에 대항해서 미국의 절대적인 우위를 지켜야 하겠다는 냉전적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파격적인 장학금에 수반되는 별도의 의무 조건은 없었다. 이 프로그램을 마친 이들의 거의 대부분은 이후 레지던트 과정을 이수했고 또 대부분이 의과대학의 교수(faculty)가 되었으며, 일반적인 MD 프로그램 이수자에 비해 NIH의 연구기금 수혜를 받은 비율도 매우 높았다. 

우리나라는 의전원 제도가 시작하면서 도입된 이 프로그램이 마치 기초의학 교수를 양성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현실적으로도 남학생의 경우 만3년에 달하는 군복무 기간을 감안하면 일반대학에 입학해서 마칠 때까지 최소 15년 이상이 소요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기초의학 교수 자리가 완전히 보장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대체 이 프로그램에 지원할 것인가? 이 프로그램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한 데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바이오헬스 업계에서 필요한 인력을 수급하기 위해 이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에서 이 프로그램이 성공한 이유는 3년 정도의 PhD를 위한 연구 과정이 추가되어도 군 복무를 해야 하는 우리보다 양성기간이 크게 늘어나지도 않고, 또 이후 레지던트 과정을 이수하여 본인의 임상 전문과목과 리서치를 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의 의대 교수는 NIH나 업계 등에서 연구기금을 받아 오면 환자 진료량을 자신이 조절 가능한 계약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과연 그러한가? 임상교수로 임용이 된다 해도 “진료에 치어서” 연구는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많은 의과대학의 현실이고, 그 보상과 위험성을 감안하면 최근 졸업생들에게는 ‘의과대학 교수’가 예전처럼 선망하던 직업이 아니다. 교수직 자체가 매력이 없어졌는데 MD-PhD가 무슨 매력을 그들에게 발휘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 프로그램을 마친다고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교수 자리가 더 보장되는 것도 아닌데.

또한 바이오헬스 업계의 현실을 안다면 의사과학자가 그 쪽으로 진출할 것이라는 기대는 희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쪽에서 필요한 인재도 대부분은 어느 정도는 임상 경험을 쌓은 전문의이지 학위를 갓 마친 MD-PhD가 아니다. 또한 그러한 업계로 진출할 의사의 비율은 전체 의사의 일부일 뿐 대다수에게는 무관한 일이다. 최고의 인재를 데려가려면 양성 과정에서 충분한 지원을 해 주고, 또 그들이 선호하는 일자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는 미국에서는 가능한 일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당분간은 불가능할 것이다. 과연 우리 국가가 아무 조건 없이 저런 ‘풍성한’ 지원을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이 상황에서 더 큰 문제는 몇몇 이공계 특화 대학들이 너도나도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해 의학전문대학원을 설립하겠다는 발상이다. 그런 대학원을 만든다면 그곳은 의사 양성기관이 아니라는 것인가? 의사-과학자도 기본은 의사고, 의사를 양성하는 데는 몇몇 생명과학자들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MD-PhD프로그램도 연구 능력이 탁월한 임상의사를 양성하는 데 있는 것이지, 임상도 모르는 유사 생명과학자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다.

바이오업계가 진짜 활성화되어 능력자들에게 임상을 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보상이 주어진다면 유능한 의사들 중에는 하지 말래도 본인이 연구 능력을 습득하여 갈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뭔가 본과 말이 전도된 이 세태가 씁쓸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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