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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엔딩
벚꽃 엔딩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3.04.11 09: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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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83)

군의관 첫해를 보낸 진해의 벚꽃은 장관이었다. 벚꽃이 한창인 시기 해거름 무렵 제황산에 올라 진해 시내를 내려다보면 거리를 가득 채운 연분홍 꽃물결이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할 지경이었다. 혈기 왕성했던 시기라 핑크빛은 복숭아꽃 색깔, 그러니까 도색(桃色)과 구분되지 않았고, 과장을 좀 보태자면 온 시가지에 ‘색기(色氣)’가 감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야릇한 기운은 초저녁의 어스름을 쫓아내기에 충분했고, 들뜬 사람들은 늦게까지 흥에 겨워했다.
  
진해에 사는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 중 하나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차와 인파가 밀려오는 군항제가 시작되기 직전 호젓한 환경에서 일찌감치 벚꽃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운이 좋으면 군항제 직후 관광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한가로운 거리에서 쏟아지는 벚꽃 비에 흠뻑 취하는 호사까지도 원주민들은 누려볼 수 있다. 다만 누구라도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황홀한 벚꽃 비 아래서 나는 당시 같이 근무하던 군의관 하나의 철없는 묘사로 인해 완전히 분위기를 망친 드문 경우다. 그때 그자는 이렇게 말했었다. 

“오호, 벚꽃이 꼭 비듬처럼 막 떨어지는군요.”
  
졸지에 진해 일대의 대지를 지루성 피부염 환자로 폄훼해버린 그 친구의 어처구니없는 센스 탓에 난 벚꽃이 떨어질 때마다 두고두고 찝찝한 연상작용에 시달려야 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이야기에 더욱 코끼리가 떠오르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후로 한동안 그 찝찝함을 조금이나마 희석해 보고 싶어서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을 때면 혹시라도 봄날 쏟아지는 벚꽃 비를 멋지고 적절하게 묘사한 문장이 안 나오나 하고 관심을 가졌다.
  
“꽃의 무덤은 신혼의 이부자리처럼 눈부셨다. 벚꽃은 폭포수처럼 질 때조차 사치스러웠다. 극단의 몰락. 화려하고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풍경의 끝에는 슬픔이 서려 있었다. 미(美)의 슬픔이었다. 동시에 장엄한 무사(武士)의 슬픔이었다.” 
  
소설가 박청호의 단편소설집 <벚꽃 뜰>(2005)에서 이런 글귀를 발견한 것은 다행이었다. 그날 이후 봄마다 떨어지는 벚꽃은 내 머릿속에서 ‘신혼의 이부자리’처럼 눈부시되 ‘아름다운 슬픔’ 혹은 ‘무사의 슬픔’으로 그 이미지가 격상되어 훨씬 고상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으니. 특히 온 생애를 국가나 조직, 혹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 충성을 다한 사무라이가 마침내 마지막 결전을 치르고 쏟아지는 벚꽃잎 아래에서 노을처럼 사라져가는 장면을 떠올리면, 장엄함보다는 한 사내의 일생에 걸친 외로움과 책임감이 한없이 슬프게 다가오는 듯했다. 떨어지는 벚꽃이 나에겐 다시 그렇게 한참 슬픔의 상징이 되었다.
  
원자력병원의 뜰에도 벚꽃은 꽤 예쁘게 핀다. 벚꽃이 만개한 봄날에는 직원들이 마당에 나와 저마다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환자와 보호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때면 봄이 가져다준 화사한 선물을 즐기느라 잠시 아픔과 근심을 잊는다. 하지만 나는 종종 자연의 아름다움에 희망을 투사(投射)하는 우리 암 환자들을 보면서 일말의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창밖에 보이는 담쟁이 잎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 잎이 다 떨어지면 자신도 마지막일 거라 생각하던, 오 헨리 단편 <마지막 잎새>의 폐렴 환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름답지만 슬픈, 벛꽃 잎들의 집단낙하를 보면서 혹시라도 감정이 이입된 환자들이 우울해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던 나는 매년 봄마다 우리 병원의 벚꽃 잎들은 제발 늦게까지 오래 붙어있길 기도하곤 했다. 노파심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함으로써 희망이 슬픔으로 바뀌는 기간을 최대한 끌어보고 싶었던 게다. 그러다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엔딩>이란 노랠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엔딩(ending)’이란 단어만 보고 벚꽃 지는 슬픔이 이 노래로 인해 배가되면 어쩌나 지레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벚꽃 엔딩>은 슬픈 노래가 아니었다. 꽃잎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가사는 하나도 없고 단지 봄바람에 의해 흩날리는 벚꽃 잎 아래서 연인과 거리 곳곳을 거닐고 싶다는 내용이 전부다. ‘벚꽃 엔딩’은 사랑하는 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는 단순한 무대장치에 불과할 뿐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찜찜함에서 슬픔으로, 다시 영화적인 미장센으로 변신해간 ‘벚꽃 엔딩’을 고찰하다가 한참 잊고 있던 것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벚나무의 매력이 봄철을 풍성하게 장식하는 벚꽃에만 잊지 않다는 점. 가을이 되면 벚나무 잎이 노란색, 갈색, 붉은색으로 곱게 물든다. 조화롭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벚나무 단풍이야말로 화려한 벚꽃 못지않은 벚나무의 자랑이 아닐까 싶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해군에 있을 때는 해군사관학교와 진해기지사령부가 봄 군항제 기간뿐 아니라 가을 단풍철에도 일반인에게 개방했었다. 그만큼 벚나무 단풍이 절경이었다는 뜻이다.
  
‘벚꽃 엔딩’은 말과 달리 실제 ‘엔딩’, 즉 끝이 아니다. 노래에도 끝을 의미하는 가사가 전혀 없는 것처럼, 한순간에 ‘폭포수처럼’ 거리에 쏟아져 내린 벚꽃도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가을이 되면, 어쩌면 꽃보다 더 예쁜 단풍잎이 나무를 휘감는다. 그러니 벚꽃 잎이 떨어질 때 꽃과 함께 희망이 추락할 이유도 없고, 상실의 슬픔보다는 오히려 머지않아 새로 드러날 또 다른 아름다움에 대해 기대를 갖는 게 당연하다. 길게 보면 다시 봄이 오고 가을이 또 오면서 꽃과 단풍이 되풀이되지 않는가.
  
누구나 인생의 매듭 매듭마다 마치 벚꽃 떨어지는 날에 은퇴하거나 사라지는 무사의 심정을 느낄 때가 있다. 화려하면서 장엄하게 마지막 마무리를 짓긴 하지만 혹시 슬픔의 감정을 다 떨쳐버리기 힘들다면 봄 벚꽃이 아닌 가을의 벚나무 단풍을 생각하자. 지난날의 화려함을 성숙함으로 조금씩 바꿔 갈 수 있다면 슬픔이 있던 자리를, 전에 누리지 못했던 자유로움과 풍요로움으로 대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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