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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치안공백’은 안되고 ‘응급의료공백’은 괜찮나?
[기자수첩] ‘치안공백’은 안되고 ‘응급의료공백’은 괜찮나?
  • 배준열 기자
  • 승인 2023.04.06 18: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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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 대구에서 10대 소녀가 4층 높이의 건물에서 떨어졌지만 의식은 있어 구급차에 실렸다. 여러 병원의 응급실에 이송을 시도했지만 수술할 전문의가 없거나 응급병상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모든 병원으로부터 수용을 거부당해 2시간여 동안 헤매다 결국 구급차 안에서 심정지로 사망했다. 고인은 ‘골든타임’ 내 응급실로 이송돼 적절한 응급수술을 받았다면 충분히 살아날 가능성이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우리나라 응급의료와 필수의료 체계의 민낯이 드러났다는 지적이다. 오래전부터 의료계가 우려를 나타내며 경고했던 일이 현실이 됐고, 앞으로 이런 비극이 더 비일비재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응급상황에서 환자를 수용할 병원이 없어 환자들이 ‘구급차 뺑뺑이’를 도는 것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2016년 교통사고를 당한 김민건 군이 병원 13곳으로부터 치료를 거부당해 사고 7시간 만에 숨졌고, 2022년 한 해에만 119구급차를 탄 채 병원을 찾다 심정지나 호흡정지를 겪은 환자 사례가 무려 190여 건에 이른다.

노력에 비해 보상이 적어 ‘기피과’로 전락해버린 필수의료에 종사하는 의사가 부족한 우리나라 의료의 고질적인 문제는 일단 차치하더라도, 일단 우리나라 중환자실 병상 수는 생각보다는 적지 않다. 인구 10만 명당 19.5개로 독일 33.9병상, 미국 25.8병상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OECD 평균 12병상에 비하면 많고 영국(10.5병상)이나 일본(5.2병상)보다도 많은 중환자실 병상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중증 응급환자들이 ‘구급차 뺑뺑이’를 돌다 병원에 이송도 한 번 되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 이유는 무엇보다 응급의료 자원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지금 어느 대학병원 응급실이라도 좋으니 방문해 보자. 과도에 손가락을 베인 환자, 경미한 자동차 접촉사고가 난 환자, 목이나 허리가 뻐근하다는 환자들이 응급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보호자 확인도 없이 데려온 ‘주취자들’까지 응급실을 차지하고 있다.

중증도를 평가해 환자를 진료가 가능한 병원과 연결해 주는 국가 차원의 응급의료 자원 배분(resource allocation)과 협력(coordination)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 동네의원에서도 충분히 진료가 가능한 경증 환자들과 중증 환자들이 뒤섞여져 응급실을 시장통으로 만들어 진짜로 응급 처치가 필요한 중증환자들을 응급실에서 수용할 수 없어서 119구급차에서 뺑뺑이나 돌다 사망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다.

이 지경이 됐는데도 문제가 해결될 기미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는 ‘주취자 응급의료센터’라는 곳이 있어서 서울에만 4곳, 전국엔 21곳이나 운영되고 있다. 말 그대로 의식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신 사람을 치료·보호하는 곳인데 그렇지 않아도 중환자와 경환자가 뒤섞여 혼란스러운 응급실에서 주취자 진료까지 전담하게 돼 의료진들이 주취자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다가 진짜 중증 응급환자들이 치료 기회를 놓쳐 사망할 가능성을 더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경찰은 “주취자는 반드시 의료진이 있는 보호시설에서 보호조치가 이뤄져야 한다”며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유일무이한 주취자 응급의료센터를 더 늘리라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제도 도입 목적으로 파출소가 주취자들로 인해 난장판이 되어 ‘치안 공백’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치안 공백’은 발생해선 안되고, ‘응급의료 공백’은 발생해도 괜찮다는 것인가?

응급의료기관의 기능과 역할을 얼마나 가볍게 생각하면 이럴 수 있을까? 최소한 OECD 국가 중에서 응급의료센터를 이런 식으로 운영하는 게 당연시되는 나라는 없다. 기자가 몇 년 전 일본 오사카의 한 대학병원의 응급실을 방문했을 때 단 한 명의 환자도 입원해 있지 않았고 의료진만 대기하고 있던 것을 목격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루에 2~3명 정도 정말 응급환자들만 찾아와 적시에 응급처치를 시행하고 있다고 들었다. 선진국 대부분은 이렇게 응급의료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더 어이없는 것은 국민의힘과 정부가 지난 5일 개최한 당정협의회에서 “의료진의 안이한 대처로 인명사고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물어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의사들에 대한 과실에 대해 법적 책임을 과도하게 물어 ‘소신진료’를 어렵게 하여 필수의료 분야의 전공의 지원율이 날이 갈수록 하락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 본질에는 전혀 주목하지 않고 의료진 때리기에만 열중해 점점 추락해 가는 이 땅의 필수의료를 이제는 아예 말살시키겠다는 것인가? 

또 최근 보건복지부는 응급의료 취약지에는 단일 또는 여러 응급의료기관에 소속된 여러 명의 응급의학 전문의가 취약지 순환 근무팀을 구성해 요일별로 순환 근무를 시킨다는 대책을 내놨다. MZ 세대 전공의들도 ‘워라벨’을 중시하는데, 이렇게 되면 과연 앞으로 누가 응급의학과를 지원할까?

심지어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필수의료에 지원하는 의사가 많아질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런 ‘낙수효과’까지 기대하려면 최소한 지금부터 10년 이상의 시간은 걸릴 것이고, 의사 수를 최소 10배 이상으로 늘려야 가능할 것이다. 의사 수를 무작정 늘릴 게 아니라 의사들이 필수의료에 자발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유인책을 먼저 마련하는 게 마땅한 순서일 것이다.

중증응급환자들이 구급차에서 병원을 찾아 헤매다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선 문제의 원인인 응급실 과밀화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이다. 경증 환자의 응급실 입원을 차단하고, 중증 환자들만 수용하고 경증 환자들을 수용하지 않으면 수익을 낼 수 없는 응급의료 수가 체계도 개선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응급실에서 치료는 의료진의 판단에 따른 중증도 순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인식을 이젠 강제적으로라도 국민들에게 주입해야 할 것 같다. 이런 면에서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은 환자가 경증 환자일 경우 건강보험을 적용하지 않는 방안은 나름 괜찮은 방안같다. 개인적으로 경증 환자를 진료함에 따라 중증 환자들의 치료가 늦어진 것에 대한 책임도 어떤 형태로든 지게 하면 좋을 것 같다. 앞으로 우리나라 특유의 응급실 과밀화 문제를 차단할 수 있는 방안이 더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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