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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정원 확대, 그리고 그레샴의 법칙
의대 정원 확대, 그리고 그레샴의 법칙
  • 전성훈 변호사
  • 승인 2023.04.04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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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61)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누구나 이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무엇보다 발언자는 이와 같이 말한 적이 없기도 하다.

16세기 초반 영국은 그 유명한 헨리 8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왕비의 시녀를 사랑하게 되자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나라 전체의 종교를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바꾼, 너무나 로맨틱하면서 충격적인 결정을 내린 왕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불과 3년 후에 그녀와 이혼하고 그녀의 목을 자른 것으로 더 유명하다. 그녀의 이름은 그 유명한 앤 불린.

영국의 세종대왕으로 칭송받고 있는 엘리자베스 여왕은 앤 불린의 맏딸이었다. 아버지에게 목이 잘린 어머니를 두었기에 그녀도 성장하면서 몇 차례 목이 잘릴 뻔했다. 하지만 행운이 도왔고 현명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그녀는 결국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아버지인 헨리 8세가 왕권 강화에 몰두하면서 38년간 호기롭게 왕 노릇한 덕분에, 여왕이 즉위할 당시 영국 경제는 어려웠고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 여왕은 다른 문제에 앞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정부가 국고를 채우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세금을 더 걷거나, 화폐를 더 찍어내어 주조차익을 얻는 것이다. 막 즉위한 25세 미혼 여왕이 세금을 더 걷는다는 것은 반란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여왕 역시 화폐를 찍어 주조차익을 얻고자 했다.

그런데 주조차익은 화폐의 액면가(100원)에서 발행비용(60원)을 공제한 것이다. 액면가는 정해져 있으므로, 발행비용을 낮출수록 정부는 더 많은 주조차익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항상 정부는 금화에서 금 함량을, 은화에서 은 함량을 줄이고자 하는 달콤한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정부가 주조차익을 탐하여 ‘적정함량 유지’라는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연히 함량미달인 화폐만 사용하고 적정함량인 화폐는 보관·저축하게 된다. 결국 단기적으로는 화폐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떨어지고, 장기적으로는 소재가치가 낮은 화폐만 유통됨으로써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그래서 영국 경제학자 토마스 그레샴은 막 즉위한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1558년 편지를 보내어 ‘좋은 동전과 나쁜 동전은 함께 유통될 수 없다(Good and bad coin cannot circulate together).’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300년 후 스코틀랜드 경제학자 헨리 매클라우드는 이러한 그레샴의 지적을 ‘그레샴의 법칙’이라고 명명하면서 ‘저질 화폐가 양질 화폐를 쫓아낸다(Bad money drives out good).’라고 부연 설명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이 설명만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일본인다운 문구로 번역해 놓았다.

정부의 단기적 이익 추구가 중장기적으로 경제 전체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자 했던 그레샴은, 일본인들의 난해한 번역을 보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난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라고 말할 것이다.

코로나19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자, 정부와 여당은 의대 정원 확대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얼마 전 여당 중요당직자는 국회에서 ‘제한된 의대 정원 내에서 의대생들은 필수의료 과목 전공을 기피하고 전문의들은 피부, 안과, 성형 등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필수의료 붕괴가 초래된 것이다’, ‘의사 수급 불균형이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된 근본적 이유는 수가는 높여달라고 주장하면서 의대 정원 확대는 막아온 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보건복지부 역시 ‘필수의료 지원 대책과 의료인력 공급 확대가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여당과 발맞춘 주장을 내놓고 있다.

의료계 역시 ‘필수의료 분야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는 진단과, ‘필수의료 분야에서 일하는 의사를 늘려야 한다’는 치료방향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의대 정원 확대’라는 치료방법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고, 나아가 여야 국회의원들이 앞 다투어 발의한 12건의 ‘지역의대 신설 법안’에는 더더욱 동의할 수 없다. 배출되는 의사 수를 늘리면 필수의료 분야에 (어쩔 수 없이) 의사가 더 갈 것이라는 추측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무식한, 실현 가능성 낮은, 희망 섞인 기대에 불과하다. 이렇게 ‘들이붓자는’ 대책은 마치 과거 이명박 정부 때의 ‘낙수 효과’ 타령을 연상케 한다.

정부와 여당이 필수의료 담당 의사와 입원전담전문의 등의 추가 채용과 근무환경 개선을 지원하기 위한 예산 확보 등과 같은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놓는다면, 의료계는 의대 정원 확대 문제를 포함하여 기탄없는 대화의 장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개선을 위해 노력한다’ 수준의 진정성 없는 립 서비스만 이어진다면, 미용·성형의료 시장만을 키울 것이 뻔한 작금의 의대 정원 확대 논의에 의료계는 응하지 않을 것이다. 의료계는, 우리 국민들이 기껏해야 점 빼는 비용을 2만 원에서 1만 원으로 낮추게 될 그런 수준의 정책을 정부와 여당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수의료에 국한하여 ‘양화’라고 말할 수는 없고, 미용·성형의료를 ‘악화’라고 단순화할 수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양화’를 선택하고자 했던 많은 의사들이 형사소송에 대한 두려움과 지속불가능한 업무량 때문에 ‘악화’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를 애써 외면하면서 상황 개선을 위한 진지한 노력 없이 ‘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라는 손쉬운 매도와 함께 의대 정원 확대를 밀어붙이는 것은, 정부가 단기적 주조차익을 탐하면서도 자신의 행동 때문에 양화가 구축되고 있는 시장을 비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레샴의 조언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레샴의 법칙은 대한민국 의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필수의료라는 양화가 유지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와 여당이 의대 정원 확대를 성급히 제안하기 이전에 의료계에 먼저 무엇을 제안하여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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