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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차서 2시간 헤매다 사망···‘필수의료 붕괴가 낳은 비극’
구급차서 2시간 헤매다 사망···‘필수의료 붕괴가 낳은 비극’
  • 배준열 기자
  • 승인 2023.03.29 1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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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의료 자원분배, 필수의료 위축, 과도한 책임 추궁 등 원인
의료계, 필수의료 의사가 소신 진료하면서도 적정 보상받아야

10대 소녀가 4층에서 추락했지만 작년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사망사건’과 마찬가지로 수술할 전문의가 없어 구급차에서 2시간여 동안 병원을 찾아 헤매다 사망한 사건이 발생해 논란이 되고 있다.

지난 19일 오후 2시 15분경 대구 북구 대현동 골목길에서 A양(17)이 4층 높이의 건물에서 떨어져 의식은 있는 채로 구급차에 실렸지만 수술할 전문의가 없거나 응급병상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모든 병원으로부터 환자수용을 거부 당해 2시간여 동안 헤매다 결국 구급차 안에서 심정지로 사망하고 말았다.

현재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부검을 의뢰해 A양의 사망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고, 소방과 병원 관계자들을 상대로 과실 여부도 조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작년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사망사건’과 마찬가지로 병원에 수술할 의사와 응급병상이 충분히 없어서 발생한 일이기 때문에 무혐의로 종결될 가능성이 높고, 만약 관련 인력들을 처벌한다고 해도 비슷한 사건이 재발하는 것을 결코 막을 순 없을 것이란 지적이다.

이번 사건처럼 응급상황에서 구급차가 출동하고도 환자를 수용할 병원이 없어 긴 시간을 헤매는 상황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에 정부는 지난 21일 ‘제4차 응급의료 기본계획(2023~2027)’을 발표해 응급이송체계를 정비하겠다고 밝혔다. 

구급차로 짧은 시간에 도착할 수 있는 대형병원들이 곳곳에 있음에도 막상 응급환자들을 수용할 수 없어 ‘구급차 뺑뺑이’를 도는 이유에 대해 우선 경증환자와 중증환자의 분리 등 응급의료 자원배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허대석 서울대병원 내과 명예교수는 29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실 우리나라의 중환자실 병상 수는 인구 10만 명당 19.5개로 독일 33.9병상, 미국 25.8병상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OECD 평균 12병상에 비하면 높다”며 “특히 영국(10.5병상)이나 일본(5.2병상)보다 우리나라가 더 많은 중환자실 병상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허 교수는 “이처럼 중환자실 병상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중증도를 평가해 환자를 진료가 가능한 병원과 연결해 주는 국가 차원의 응급의료 자원 배분(resource allocation)과 협력( coordination) 기능이 작동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다만 이번에 사망한 A양과 같은 중증외상환자의 경우 응급병상으로 이송되더라도 수술할 전문의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없이 환자를 방치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허 교수 역시 “병원 입장에서는 인력 부족 등의 이유로 여건이 되지 않아 중환자실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현재 극심한 저수가로 인해 응급실과 중환자실은 운영할수록 적자가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로 인해 의사들도 노력에 비해 보상이 부족한 필수의료 분야에 종사하기 힘들기 때문에 병원에서 응급·중증 의료인력을 충분히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여기에 더해 생명이 위독하고 빠른 처치가 필요한 환자를 치료하다가 만약 안좋은 결과가 나올 경우 의사를 상대로 법적 책임을 묻는 등 ‘책임 추궁’에 집착하는 우리나라 특유의 문화가 의사들의 ‘방어진료’를 부추겨 A양의 경우처럼 비극적인 상황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수술할 의사가 없으면 중증응급외상환자가 억지로 응급실에 이송됐다고 해도 방치될 수밖에 없다”며 “결국 이 때문에 충분한 필수의료 인력이 확보돼야 하고, 의사들이 위축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소신 진료를 하면서도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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