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병원 홍보대사인 노사연, 이무송 부부가 모처럼 병원장실을 찾았다. 기관 출범 60주년을 기념해 올가을 개최하려는 음악회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가요계 마당발인 이들 부부의 도움으로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는 거의 매년 암 환자들을 위한 음악회를 열곤 했었다. 그간 김장훈, 조항조, 장윤정, 박상민, 아이유 같은 유명 가수들이 별다른 사례도 없이 재능기부 형태로 선뜻 이 행사에 참가해 준 걸 보면 우리 홍보대사 두 분에 대한 동료 가수들의 신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이들 부부와의 대화는 언제나 유쾌하다. 두 분 모두 방송에서 갈고 닦은 촌철살인의 입담과 재치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이야기하다 보니 문득 내 머릿속엔 몇 년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소위 ‘깻잎 논쟁’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났다. 어느 여자 후배와 두 부부가 식사하던 중 그 후배가 뭉친 깻잎을 낱개로 떼어내지 못해 쩔쩔매는 걸 본 이무송씨가 아래쪽 깻잎을 젓가락으로 지그시 눌러주었다가 노사연씨로부터 된통 야단을 맞았다는 이야기. 노사연씨는 ‘이성(異姓)의 깻잎은 떼어주지 않는다’라는 조항을 부부 십계명에 새로 올려야 한다고 일갈했지만, 자신의 배우자가 이런 행동을 보일 때 과연 이게 화를 낼 일이냐 하는 게 SNS상에서 논란이 됐었다.
노사연씨의 노래를 무척 좋아하는 나는 깻잎이야 어쩌다 튀어나온 부수적인 상징물이고 정작 본심은 다른 곳에 있음을 잘 안다. 그건 그녀의 노래 <바램> (표준어는 ‘바람’이지만 아마 ‘부는 바람’이나 불륜을 의미하는 ‘바람’과 구분하려 일부러 이렇게 적지 않았을까) 가사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큰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한마디/ 지친 나를 안아주면서/ 사랑한다/ 정말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해 준다면/ 나는 사막을 걷는다 해도/ 꽃길이라 생각할 겁니다”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가수 김종환은 오직 노사연만을 위한 노래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오래도록 세심히 살펴본 뒤 가사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정성껏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 배경이 있었기에 이 노래의 원래 제목은 <사연의 마음>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았으나 2015년 <바램>이 나온 뒤 5년 만에 남편 이무송씨도 2020년 말 신곡을 발표했다. 제목은 <사랑합니다>. 누가 봐도 아내 노사연씨의 작은 ‘바램’에 대한 남편의 화답이라 생각할 만하다. 진지한 노사연씨의 요청과 달리 이무송씨의 대답은 좀 익살스럽고 명랑한 멜로디에 실렸지만, 그 또한 두 사람의 성격을 잘 담아낸 것 같다.
노래를 통한 우리 병원 홍보대사 부부의 이야기, 그러니까 누군가 지친 자신을 꼭 안아주면서 ‘사랑한다’ 말해주는 것은, 어쩌면 고달픈 오늘을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원하는 것이리라. 얼마 전 정든 병원을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우리 내과 후배를 두 팔로 꼭 안아주면서, 난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허그(hug)’, 곧 ‘포옹’의 힘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대학 시절 출석하던 교회 대학부에서는 여름철마다 지방으로 수련회를 떠나곤 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는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 우리는 서로를 꼭 안아주면서 인사를 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시간에 갑자기 울컥하면서 눈물을 쏟는 친구들이 많았다. 몇 밤을 함께 지내며 미래에 대해, 또 신앙에 대해 비슷한 고민을 나누느라 정도 많이 들었겠지만, 무엇보다 포옹할 때 전해지는 인간의 따뜻한 온기 그 자체가 엄청난 힐링이었던 것 같다. 역설적으로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외로운 존재들이었는지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고.
성인이 되고, 의사가 된 이후에 인사를 ‘허그’로 했던 적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족들끼리도 외국에 떨어져 있다가 오랜만에 만났을 때, 혹은 누군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서 가벼운 포옹을 하는 정도였지, ‘프리허그’ 운동의 창시자인 호주 청년 ‘후안 만(Juan Mann)’이 길거리에서 보여주던 수준의 안아줌은 베풀지도 받지도 못했던 것 같다. 게다가 강제로 거리두기를 해야만 했던 코로나 시절까지 겹쳤으니 오죽하랴.
코로나 상황이 많이 나아진 요즘 <바램>의 노랫말 가운데 ‘지친 나를 안아주면서’란 대목이 이명처럼 내 귀에 맴돈다. 물론 이어지는 이 노래의 클라이맥스, ‘사~랑~한다, 정말 사랑한다’와 함께 말이다. 나이, 성별에 따른 관습이나 체면 때문에 꼭 끌어안는 인사를 자주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오해받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레 기회를 노려보련다. 지친 사람을 위로할 때 그보다 즉각적으로 효과를 발휘하는 방법은 없을 듯 하기에.
‘지친 나를 안아주면서’를 반복해 흥얼거리다가 다소 엉뚱한 옛 기억이 소환되었다. 인디애나 의과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비타민 C 연구로 유명했던 하병근 박사는 내 의대 동기다. 그는 본과 시절 내내 과 대표로 동기들을 위해 애썼는데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이 친구가 독특한 춤솜씨를 보여준 적이 있다. 양쪽 팔을 교차해서 스스로 몸을 꽉 끌어안고 혼자서 소위 ‘블루스’를 추기 시작한 것이다. 워낙 마른 체형에다 팔은 상대적으로 길어서 그 모습을 뒤쪽에서 보면 등 뒤로 보이는 손이 마치 파트너의 것처럼 보였다. 양손을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추는 춤 같아 친구들은 박장대소했었다.
‘지친 나를 그렇게 스스로 안아주는 방법도 있겠구나’라는 데 생각이 미친 나는 잠시 옛날 병근이의 자세를 흉내 내 본다. 손이 등 쪽까지 넘어가진 않아 ‘블루스’ 개인기를 보여주는 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지친 내게 잠시 기운을 불어넣는 동작으로 활용할 수는 있을 듯하다. 쑥스럽더라도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사랑한다’는 고백까지 덧붙인다면 약간의 시너지 효과가 있지 않을까.
비타민 C 효과에 대해 한참 열정적으로 공동연구를 진행하던 하병근 박사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11년째다. 지금이라도 만난다면 으스러지게 안아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쉽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이 지쳐있을 때, 행동으로 또 말로 애정을 고백하고 위로할 수 있는 시간이 아주 많지는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