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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나를 안아주면서
지친 나를 안아주면서
  • 홍영준
  • 승인 2023.03.28 0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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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82)

우리 병원 홍보대사인 노사연, 이무송 부부가 모처럼 병원장실을 찾았다. 기관 출범 60주년을 기념해 올가을 개최하려는 음악회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가요계 마당발인 이들 부부의 도움으로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는 거의 매년 암 환자들을 위한 음악회를 열곤 했었다. 그간 김장훈, 조항조, 장윤정, 박상민, 아이유 같은 유명 가수들이 별다른 사례도 없이 재능기부 형태로 선뜻 이 행사에 참가해 준 걸 보면 우리 홍보대사 두 분에 대한 동료 가수들의 신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이들 부부와의 대화는 언제나 유쾌하다. 두 분 모두 방송에서 갈고 닦은 촌철살인의 입담과 재치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이야기하다 보니 문득 내 머릿속엔 몇 년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소위 ‘깻잎 논쟁’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났다. 어느 여자 후배와 두 부부가 식사하던 중 그 후배가 뭉친 깻잎을 낱개로 떼어내지 못해 쩔쩔매는 걸 본 이무송씨가 아래쪽 깻잎을 젓가락으로 지그시 눌러주었다가 노사연씨로부터 된통 야단을 맞았다는 이야기. 노사연씨는 ‘이성(異姓)의 깻잎은 떼어주지 않는다’라는 조항을 부부 십계명에 새로 올려야 한다고 일갈했지만, 자신의 배우자가 이런 행동을 보일 때 과연 이게 화를 낼 일이냐 하는 게 SNS상에서 논란이 됐었다.
  
노사연씨의 노래를 무척 좋아하는 나는 깻잎이야 어쩌다 튀어나온 부수적인 상징물이고 정작 본심은 다른 곳에 있음을 잘 안다. 그건 그녀의 노래 <바램> (표준어는 ‘바람’이지만 아마 ‘부는 바람’이나 불륜을 의미하는 ‘바람’과 구분하려 일부러 이렇게 적지 않았을까) 가사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큰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한마디/ 지친 나를 안아주면서/ 사랑한다/ 정말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해 준다면/ 나는 사막을 걷는다 해도/ 꽃길이라 생각할 겁니다”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가수 김종환은 오직 노사연만을 위한 노래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오래도록 세심히 살펴본 뒤 가사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정성껏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 배경이 있었기에 이 노래의 원래 제목은 <사연의 마음>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았으나 2015년 <바램>이 나온 뒤 5년 만에 남편 이무송씨도 2020년 말 신곡을 발표했다. 제목은 <사랑합니다>. 누가 봐도 아내 노사연씨의 작은 ‘바램’에 대한 남편의 화답이라 생각할 만하다. 진지한 노사연씨의 요청과 달리 이무송씨의 대답은 좀 익살스럽고 명랑한 멜로디에 실렸지만, 그 또한 두 사람의 성격을 잘 담아낸 것 같다.
  
노래를 통한 우리 병원 홍보대사 부부의 이야기, 그러니까 누군가 지친 자신을 꼭 안아주면서 ‘사랑한다’ 말해주는 것은, 어쩌면 고달픈 오늘을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원하는 것이리라. 얼마 전 정든 병원을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우리 내과 후배를 두 팔로 꼭 안아주면서, 난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허그(hug)’, 곧 ‘포옹’의 힘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대학 시절 출석하던 교회 대학부에서는 여름철마다 지방으로 수련회를 떠나곤 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는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 우리는 서로를 꼭 안아주면서 인사를 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시간에 갑자기 울컥하면서 눈물을 쏟는 친구들이 많았다. 몇 밤을 함께 지내며 미래에 대해, 또 신앙에 대해 비슷한 고민을 나누느라 정도 많이 들었겠지만, 무엇보다 포옹할 때 전해지는 인간의 따뜻한 온기 그 자체가 엄청난 힐링이었던 것 같다. 역설적으로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외로운 존재들이었는지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고.
  
성인이 되고, 의사가 된 이후에 인사를 ‘허그’로 했던 적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족들끼리도 외국에 떨어져 있다가 오랜만에 만났을 때, 혹은 누군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서 가벼운 포옹을 하는 정도였지, ‘프리허그’ 운동의 창시자인 호주 청년 ‘후안 만(Juan Mann)’이 길거리에서 보여주던 수준의 안아줌은 베풀지도 받지도 못했던 것 같다. 게다가 강제로 거리두기를 해야만 했던 코로나 시절까지 겹쳤으니 오죽하랴.
  
코로나 상황이 많이 나아진 요즘 <바램>의 노랫말 가운데 ‘지친 나를 안아주면서’란 대목이 이명처럼 내 귀에 맴돈다. 물론 이어지는 이 노래의 클라이맥스, ‘사~랑~한다, 정말 사랑한다’와 함께 말이다. 나이, 성별에 따른 관습이나 체면 때문에 꼭 끌어안는 인사를 자주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오해받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레 기회를 노려보련다. 지친 사람을 위로할 때 그보다 즉각적으로 효과를 발휘하는 방법은 없을 듯 하기에.
  
‘지친 나를 안아주면서’를 반복해 흥얼거리다가 다소 엉뚱한 옛 기억이 소환되었다. 인디애나 의과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비타민 C 연구로 유명했던 하병근 박사는 내 의대 동기다. 그는 본과 시절 내내 과 대표로 동기들을 위해 애썼는데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이 친구가 독특한 춤솜씨를 보여준 적이 있다. 양쪽 팔을 교차해서 스스로 몸을 꽉 끌어안고 혼자서 소위 ‘블루스’를 추기 시작한 것이다. 워낙 마른 체형에다 팔은 상대적으로 길어서 그 모습을 뒤쪽에서 보면 등 뒤로 보이는 손이 마치 파트너의 것처럼 보였다. 양손을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추는 춤 같아 친구들은 박장대소했었다.
  
‘지친 나를 그렇게 스스로 안아주는 방법도 있겠구나’라는 데 생각이 미친 나는 잠시 옛날 병근이의 자세를 흉내 내 본다. 손이 등 쪽까지 넘어가진 않아 ‘블루스’ 개인기를 보여주는 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지친 내게 잠시 기운을 불어넣는 동작으로 활용할 수는 있을 듯하다. 쑥스럽더라도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사랑한다’는 고백까지 덧붙인다면 약간의 시너지 효과가 있지 않을까.
  
비타민 C 효과에 대해 한참 열정적으로 공동연구를 진행하던 하병근 박사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11년째다. 지금이라도 만난다면 으스러지게 안아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쉽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이 지쳐있을 때, 행동으로 또 말로 애정을 고백하고 위로할 수 있는 시간이 아주 많지는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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