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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에는 천사도 있다
‘디테일’에는 천사도 있다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3.03.1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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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81)

‘좀스럽다’라는 말은 주로 마음 씀씀이가 보잘것없이 작거나 도량이 좁고 옹졸한 사람을 묘사할 때 사용한다. 그런 이를 일컬어 ‘좀생이’라고도 하는데, 대개는 사람들이 ‘쫌생이’라고 된소리로 발음하는 걸 보면 뭔가 못마땅한 감정이 투영되는 것 같다. 어쨌거나 사소한 일에 트집을 잡거나 지적을 많이 하면 영락없이 좀스럽다는 소릴 듣기 마련이다.
  
적지 않은 의사들이 그런 성향을 띄지만, 특히 온종일 깨알 같은 글씨의 판독 보고서와 숫자로 된 검사 결과와 씨름하는 진단검사의학과 의사는 문서의 오탈자나 숫자의 소수점, 혹은 단위 따위에 대단히 민감하다. 작은 실수 하나가 환자에게 치명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남들 눈엔 강박적으로 보일 만큼 기꺼이 ‘좀스러움’을 감수한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의료기관 인증평가 중간 현장조사 때 있었던 일이다. 한 조사위원으로부터 병원 약국 이외의 일부 장소, 그러니까 수술장 같은 곳에서 보관하는 소량의 약들에 대한 관리가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장부가 있기는 하지만 그저 관리상태가 매번 ‘적합’이라고 체크되어 있지, 어떤 약이 몇 개 사용되었는지 주기적인 재고관리가 상세하게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고 시급히 개선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평소에도 그런 성향이 약간 있던 터에 외부인의 지적질 자극까지 받다 보니 난 한동안 극도로 좀스러워졌다. 우선 병실 곳곳에 붙어있는 ‘빠른 쾌유(快癒)를 바랍니다’란 문구부터 거슬렸다. ‘쾌(快)’라는 한자 자체가 이미 ‘빠르다’란 뜻인데 이 무슨 ‘운명의 데스티니’며 ‘마지막 피날레’ 같은 소리냐고 간호부에 한마디 했다. 뒤이어 있었던 우수 직원 포상 행사 때는 단상의 플래카드가 문제였다. ‘우수 직원 포상 수여식’이라 적혀 있는 어색한 문구가 내 잔소리를 피해가지 못했다. ‘포상(褒賞)’이란 말에 이미 ‘상을 준다’란 의미가 담겨 있는데 거기에 또 ‘수여’란 말을 덧붙이는 건 회사의 ‘시혜(施惠)’를 강조하고자 총무인사팀이 도입한 새로운 트렌드냐고 핀잔을 주었다.
  
기껏 일을 다 하고도 병원장에게 좋은 소릴 못 들은 것은 시설팀도 마찬가지였다. 병원 본관 건물 외벽이 낡아 일부 타일이 떨어지는 상황이 되었기에 옥상 부근 외벽을 보강하는 공사를 해야만 했다. 튼튼하게 공사를 잘 마치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마지막에 사용한 자재의 색깔이 짙은 회색으로 기존 건물의 붉은 벽돌색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알고 보니 계약된 마감재는 이미 옵션이 딱 정해져 있어서 우리 마음대로 어울리는 색을 고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본관 옥상층 외벽은 사람으로 치면 얼굴의 이마 부위쯤 될 텐데 외모를 좌우하는 색상이라면 좀 더 심도 있게 고민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또 잔소리를 하다가, 문득 옛날 우리 병원이 광화문에서 공릉동으로 신축 이전할 당시의 원장님 한 분이 떠올랐다. 원자력병원 본관 건물을 미국 NIH 산하의 국립암연구소(NCI) 건물과 유사하게 짓고자 설계를 주도하셨다고 한다. 마치 NCI처럼 우리 병원이 지금의 벽돌색 외형을 갖추게 된 이유다.
  
설계부터 관여하셨기에 그 원장님은 병원 건물에 대한 애정이 끔찍하셨다고 한다. 신축 개원 초창기에는 사무실에 달력을 하나 걸려고 해도 원장님의 허락이 있어야 했고, 못 박는 위치도 원장님이 정해주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래 근무한 직원들의 입을 통해 전설처럼 내려온다. 물론 이쯤 되면 좀 과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런 집착, 강박, 꼼꼼함, 세심함, 그리고 좀스러움까지 죄다 끌어모아 한데 갈아 넣은 단어로 ‘디테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좋은 의도로 내린 큼직한 결정이 현장에서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그리고 현장의 논리가 나름대로 타당할 때, 어떤 결정권자들은 하부 계획을 세우고 추진한 실무자를 원망한다. 자신을 은밀히 거부하는 실무자들이 세부 사항 사이에 악마를 숨겼다고 의심한다.”
  
소설가 장강명이 <실력은 디테일에 있다>라는 제목으로 작년 한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의 일부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고 하는, 널리 알려진 경구를 해설하면서 그는 디테일에 약한 우리 정치인들에게 남 탓 말고 부단히 공부할 것을 촉구한다. 그의 말마따나 일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라면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어 악마 타령을 하는 경우도 많겠지만, 반대로 일이 기대 이상으로 잘 진행될 때는 디테일에 강한 누군가로 인해 천사가 초대되었음이 분명하다. 좀스러움에 약간의 책임감 혹은 의무감이 섞여 꼼꼼함과 세심함이 되었다가 여기에 다시 일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듬뿍 들어가서 완성된 디테일은 천사를 불러온다.
  
지난달 초에 아르헨티나 과기부 장관 일행이 우리 기관을 방문했다. ‘붕소중성자포획치료(BNCT)’와 관련한 협력 논의를 위해 VIP들이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첫 일정으로 공항에서 바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니만큼 접대에 신경이 많이 쓰였다. 나는 과거 경험을 살려 본관 건물에 아르헨티나 국기를 게양하도록 일찌감치 행정 부서에 요청했었다. 멀리서 오신 손님들일수록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자국기가 펄럭이는 걸 보며 감동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형 아르헨티나 국기는 성조기나 유니온 잭처럼 쉽게 구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빠른 시간 안에 아르헨티나 국기를 구하는 게 불가능하다면서 담당자는 아예 프린터로 출력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자가 제조하는 국기의 품질을 어떻게 믿겠는가. 논의 끝에 최근 병원 입구 건물에 설치한 대형 모니터를 이용해서 아르헨티나 국기를 화면에 띄우기로 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 홍보팀 직원의 디테일이 빛을 발했다. 단순히 국기 모양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순식간에 짧은 동영상을 제작한 것이다. 스페인어로 환영 인사를 넣은 것은 물론, 마무리는 리오넬 메시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지난 월드컵의 한 장면이었다. 아르헨티나 장관 일행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들어 온 그 장면에 열광했고 그 앞에서 너도나도 기념촬영을 했다. 마침 그들이 가져온 기념품도 메시의 유니폼이었고 축구 이야기로 시작된 업무협의는 너무나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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