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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소 잃어야 외양간 고치는 국회·정부
[기자수첩] 소 잃어야 외양간 고치는 국회·정부
  • 홍미현 기자
  • 승인 2023.03.14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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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9월 수술실에 CCTV 설치를 의무화하는 의료법 시행을 앞두고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성형외과에서 진료 장면과 여성의 신체가 촬영된 영상들이 유출되는 사건이 벌어져 의료계 안팎에 충격을 주고 있다. 

해당 영상 유출로 연예인을 포함한 30여명의 피해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영상이 퍼져나가 2차 피해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의료계에서는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는 반응과 함께 수술실 CCTV 설치 의무화의 전면 중단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환자의 수술 장면을 녹화하는 순간, 영상 불법 유출로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이유에서다.

이번 사건 이후 일선 의료진들은 “법안이 통과될 때 목에 피를 토하며 우려하던 피해 사례가 나왔다”며 “리스크 부담이 큰 수술을 의사가 기피하려 할 것”이라는 우려를 다시 내놓고 있다. “수술실 영상으로 범죄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의료사고 방지보다는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만큼 더 이상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는 비판도 이어진다.

수술실 CCTV 설치 의무화 법안은 지난 2021년 전 세계 최초로 국회를 통과했다. 수술실 안에 외부 네트워크와 연결되지 않은 CCTV를 설치·운영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이 골자다. 영상 촬영은 환자나 보호자의 요청이 있을 때 녹음 없이 하고, 열람은 수사·재판 관련 공공기관이나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요청이 있거나 환자와 의료인 쌍방 동의가 있을 때 하도록 했다. 촬영정보를 유출하거나 훼손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 벌금으로 처벌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법 시행을 앞두고 국회는 올해 예산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수술실 CCTV 설치 관련 예산을 정부안대로 통과시켰다. 모든 병원급 이하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보건복지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각각 CCTV 설치 비용의 25%를 부담하고, 나머지 50%는 의료기관이 자체 부담해야 한다. 현재 지자체들은 수술실을 갖춘 의료기관들을 대상으로 제도 시행 전까지 CCTV 설치가 마무리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영상 유출 사태로 사회적인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간다. 결국 '내 영상과 정보가 유출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수술실 CCTV 설치 의무화에 찬성했던 국민들조차 불안감이 커지기는 마찬가지다. 

일각에서는 이번에 유출된 영상의 경우 CCTV가 아닌 유·무선 인터넷과 연결된 IP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인 반면, 폐쇄회로로 동작하는 CCTV는 외부로 연결되지 않아 영상 무단 유출이 어렵다는 의견도 나온다. 그러나 CCTV 역시 일단 영상이 저장되는 순간 유출될 가능성은 매한가지다.

영상이 유출되면 환자 본인은 물론, CCTV를 관리하던 병원 직원에 CCTV 업체 관계자까지 모두 벌벌 떨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하드웨어 도난 등으로 영상이 유출될 경우 피해는 언제든지 더 커질 수 있다. 

입법 과정에서 정부와 국회는 국민들의 사생활 침해와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개념과 대안도 없이 ‘국민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오히려 국민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야말로 무책임한 발상이었다. 우리 정부와 국회의 행태에 세계의사회는 “대한민국의 정치권에서는 의사들의 전문성과 자율 평가·통제를 극도로 억제하는 쪽으로 모든 규제의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며 “이는 의료 발전의 역사와 경험에 완전히 배치된다”고 꼬집었다. 

이번 영상 유출 사태와 같은 사례가 앞으로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법 시행까지 반 년 이상 남은 만큼, CCTV 설치 기준과 촬영 범위를 명확히 하는 등 제도를 전면 재정비해야 한다. 영상 유출 시 의료기관장에게 모든 책임을 묻도록 한 처벌 규정도 의료계의 목소리를 충분히 반영해 손봐야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더라도 잃어버린 소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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