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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의 혼란
애덤 스미스의 혼란
  • 전성훈 변호사
  • 승인 2023.03.07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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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61)

부모의 교육열은 본능이다. 내 유전자를 더 나은 유전자와 조합시켜 남기기 위해 좋은 배우자를 찾는 것이 육체적 본능인 반면, 이미 조합된 결과물을 잘 가르쳐 더 생존에 적합한 개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정신적 본능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천 년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2세 교육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왔다.
  
그래서 ‘그랜드 투어(Grand Tour)’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18세기경부터 영국, 독일 등의 상류층 귀족 자녀가 사회에 나가기 전에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수년간 방문하여 언어와 교양과 문화를 익히는 ‘일생에 한 번뿐인’ 여행을 일컫는다. 현대의 해외유학의 원형이다.
  
당시는 종교 갈등, 치안 부재로 여행 자체가 매우 위험했다. 게다가 교통수단은 말과 마차였고 체계적 교육 시스템도 수립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여행과 교육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비용은 현재 화폐가치로 매년 2억 5천만 원쯤이었다고 하는데, 당시의 경제력이 현재의 20분의 1이었음을 생각하면 실로 엄청난 비용이었다.
  
귀족 자녀는 보통 2명의 가정교사와 여러 명의 하인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가정교사 1명은 학문, 교양, 문화 등을 가르쳤고, 1명은 승마, 펜싱, 전술학 등을 담당했다. 이 가정교사는 높은 보수와 교육적 권위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당대의 지식인들은 이 역할을 상당히 선호했다.
  
1764년 영국 정치인 찰스 타운센드 공작은 유럽에 명성을 떨친 ‘도덕감정론’의 저자를 파격적 조건으로 장남의 그랜드 투어에 가정교사로 모셨다. 이 가정교사는 여행 중 친구에게 “나는 요즘 시간을 때우려고 책을 한 권 쓰고 있다네”라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는 여행이 끝난 후 책을 출간했는데, 그 제목은 ‘국부의 형성과 그 본질에 관한 연구’였다. 그렇다. 이 책이 바로 그 유명한 ‘국부론’이고, 그 가정교사는 애덤 스미스였다. 그리고 애덤 스미스가 편지에서 한 말은 경제학사상 가장 겸손한 발언으로 꼽히기도 한다.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가장 억울한 경제학자이기도 하다. ‘국부론’에서 발췌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이 앞뒤 다 자르고 왜곡 인용되고 있어 그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라’는 극단적 시장자유주의자로 오해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그의 억울함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국부론을 출간할 당시의 영국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경제를 급속히 성장시키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극소수의 독점자본가들은 정부에 돈을 대면서 정부가 중상주의를 표방하도록(=자신들을 보호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자본주의라는 것을 처음 경험하는 영국 정부는 독점을 막아야 할 필요성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정부는 (이전 왕정시대처럼) 아무런 기준 없이 민간의 경제활동을 간섭하고 통제하고 있었고, 이를 정부도 민간도 당연하게 여겼다.
  
이런 불합리를 목격한 애덤 스미스는 ‘독점자본을 옹호하는 부패한 정부에게 시장을 맡기기보다는, 차라리 정부가 민간의 경제활동에 간섭하지 말고 시장에 맡기는 것이 낫다’, ‘각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내버려 두면 시장에 ‘보이지 않는 손’이 기능하여 결과적으로 사회복지가 증진되고 국가경제가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즉 건전한 경쟁을 통해 합리적 균형을 자율적으로 찾는 시장이 사회와 국가에 도움이 된다고 갈파한 것이다.
  
지난 달 23일 헌법재판소는 ‘의원급 비급여 보고 의무화’에 대해 의료계가 제기한 헌법소원 사건에 대해 합헌 5인, 위헌 4인으로 합헌 결정했다. 이제 정부는 의원급 비급여 보고 의무화를 밀어붙일 것으로 보인다.
  
우리 건강보험제도의 가장 큰 특징은 저수가·저보장이라는 점이다. 국민개보험이라는 어려운 제도를 빠르게 안착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나, 그로 인해 시급하지 않은 의료행위는 ‘비급여’라는 이름으로 민간 공급자의 운영과 소비자의 선택에 맡겨졌다. 그리고 비급여 분야는 수십 년 동안 치열한 경쟁을 거치면서 의료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아 왔고, 안전성과 효율성 그리고 비용 면에서 가장 합리적인 시장을 형성했다. 이러한 점은, OECD 어느 나라와 비교하더라도 우리나라 의료가 최고의 서비스와 최저의 비용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독점’이란 것은, 적어도 대한민국 비급여 분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정부는 의원급 의료기관들의 비급여진료 내역 공개를 통하여 의료서비스 개선과 비급여진료 비용 저감을 기대한다고 말하지만,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인 우리나라의 비급여진료 서비스에 더 이상 개선할 여지가 남아있는지 의문이고, 의료기관들이 무한 경쟁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더 이상 비용을 저감할 여지가 남아있는지도 의문이다.
  
이번 헌법소원 사건에서 위헌 의견을 낸 헌법재판관 4인은 ‘국가가 모든 의료기관의 비급여진료비용을 공개하고 최저가·최고가를 비교해 순위화하는 것은 의료기관 간 가격경쟁을 유도해 의료의 질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직결되는 의료 분야에서는 가격보다 질 관리가 중요하다는, 너무나 당연한 점을 지적한 최고헌법해석기관의 의견에 정부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불변의 것이 아니고, 호주제나 간통죄와 같이 사회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애덤 스미스가 태어난 지 300년이 되는 해이다. 이 위대한 경제학자는, 독점을 상상할 수 없는 무한 경쟁 속에서 경제주체들의 자율적인 판단으로 합리적으로 형성되어 수십 년간 잘 기능하고 있는 시장에, 대한민국 정부가 굳이 개입하려는 이유에 대해 무척 혼란스러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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