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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복규 교수의 의료만필(醫療慢筆) 7] 국가와 의료
[권복규 교수의 의료만필(醫療慢筆) 7] 국가와 의료
  • 의사신문
  • 승인 2023.02.28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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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복규 교수(이화의대, 의학교육학교실)

최근에 소아과나 산부인과, 그리고 이른바 필수의료에 대한 대책이라고 내놓는 것들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어떤 정책이든 관(官)의 힘을 사용하여 의사를 거의 강제적으로 일하도록 시키겠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의사를 건강보험제도의 틀 내에 강제로 편입하겠다는 요양기관 당연지정제도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나라의 의료 파행의 가장 근원은 이 요양기관 당연지정제도에 있다. 

자유 서비스업인 의사가, 왜 자신의 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국가가 만든 건강보험제도에 강제로 편입되어야 하는가? 이것이 일종의 계약이라면 수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의사들이 원하는 정도의 수가를 제공해서 의사(또는 의사집단)가 동의하였다면 이런 식의 계약을 맺을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계약과 마찬가지로 계약의 당사자는 어느 쪽이건 원하지 않을 때는 계약을 해지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의사와 의사의 업에 대해서는 너무나 자명한 근대 사회의 이 원리가 통하지 않는다.

공산주의 국가라면 모든 생산수단이 국가의 소유이고, 개개인의 업도 국가가 정해주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개인의 계약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혹자는 국가가 면허를 주었기 때문에 의사는 국가의 방침을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과연 그럴까? 면허란 무엇인가? 면허는 어떤 의사가 그 일을 할 자격이 있음을 알려주는 표지이다. 그리고 의사가 그 일을 할 자격이 있는지 여부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아는 것이 아니라 동료 의사 집단이 안다. 

국가는 다만 의사집단의 그러한 판정에 대해서 일종의 보증을 해 줄 뿐이고, 따라서 면허를 부여하는 것이 무슨 특권을 부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아니 그렇다면 국가는 무자격자가 의료행위를 하는 것을 방치해야 할까? 애초 면허라는 것은 의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것이고, 국민 건강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국가가 의사 집단의 판단에 대해 보증을 서 주는 것이다. 의사 면허가 무슨 토지 이용권이나 어장의 어업권과 같은 것인가?

의사의 수를 제한하는 것도 무슨 의사집단의 힘이 세서 독점권을 얻어낸 것도 아니다.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해 의사의 힘이 세다면 대체 이런 정책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질 수 있을까? 의사의 수가 16만 명이라 하지만 5천만 국민의 수 앞에는 무력할 뿐이다. 의사의 수가 지나치게 늘어나면 우선 의사의 질이 하락하고, 그보다 더 큰 문제로 국가의 보건의료비용이 폭증한다. 

의료는 무한한 자원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인간의 생명은 물론 소중하지만 어느 나라나 의료에 투입할 수 있는 자원의 양은 한정되어 있다. 의사의 수를 늘리면? 지금도 아슬아슬한 건강보험 재정은 더욱 빨리 고갈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고, 그에 동원될 수 있는 자원은 무한하기에 어느 정도에서 이를 억제하지 않으면 건강보험 뿐 아니라 전체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심각해지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더불어 급속히 고령화되어 의료 수요가 폭증하고 있지 않은가.

국가가 의료 및 의사를 좌지우지하려면 먼저 전제 조건이 있다. 의료기관을 모두 국영화, 혹은 공공기관화 하고, 의사를 공무원화하면 된다.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도 물론 많이 있다. 개별 의사 입장에서는 민간인이든 공무원이든 의사로서 일을 하면서 적절한 수입을 받으면 그만이다. 의료 행위로 거대한 부를 축적하는 건 자유시장경제에서도 사실상 불가능하고, 그런 뜻이 있다면 의료를 제공하기보다는 의료지식과 경험을 활용해서 기업을 세우는 편이 훨씬 나은 선택이 될 것이다.

그런데 국가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미 옛 공산주의권 국가들을 비롯해서 이렇게 의료를 공영화한 나라들의 전례를 보고 있다. 이런 나라들은 의료 수요의 억제에 시장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 ‘무상 의료’라는 이상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의료 수요는 어떻게 억제하나? 대기시간 연장과 ‘불필요한’ 의료를 억제하는 각종 지침으로 묶는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나라든 의료 재정이 붕괴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전문의를 만나려면 몇 개월이 걸리고, 수술을 받으려면 몇 년이 걸리며, 어지간한 병은 대증요법으로 관리하게 된다. 그렇게 하면서도 이번 영국 NHS의 젊은 의사들이 파업에 돌입한 것처럼 소속 의사들의 불만은 크고, 오래 기다리고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는 국민의 불만 역시 크다. 결국 들인 예산에 비해 효율은 크게 떨어지는 경직된 의료제도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걸 잘 아는 우리나라는 솔직히 그런 담대한 공영화를 할 마음도 없다.

결국은 언제나 그렇듯 있는 의사들을 쥐어짜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마른 행주를 쥐어짜듯 온갖 법과 정책으로 의사들을 옭아놓으면 의사들이 가는 곳은 하나다. 그런 관료주의가 적용되지 않는 세계로 가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미용과 성형, 항노화, 건강증진의 영역인 것이다. 그런 곳에서 올리는 수입을 포함하여 의사의 수입이 얼마라고 분개하기 보다는, 왜 의사들이 별로 원하지 않으면서도 그런 곳으로 가게 될까를 고민해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근대국가로서 국가의 구성과 작동 원리 자체에 큰 결함이 있는데 말단에서 아무리 이리 손보고 저리 손봐야 크게 나아질 것은 없을 것이다. 오늘도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의사들은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냉소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의료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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